애물단지.1/문경아제 작년겨울에 시집간 딸아이가 보고싶을 땐 101동 서쪽끝자락 철망에 붙어서서 부영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아빠는 잘못하는 게 열가지도 넘는다고 쫑알거리던 고 조그만 입 떠올리며 빙그레 웃으본다 지금 이 시간도 분필가루 마시며 딸아이는 아이들 가르치고 있겠다 하나 둘 불빛이 꺼.. 시 2017.12.13
겨울의 끝/오세영 매운 고추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았을까, .. 시 2017.12.02
낙엽이 가는 곳/문경아제 낙엽이 굴러간다 바람에 등떠밀려 데굴데굴 굴러간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보고 굴러간다 어머니가 계시는 해돋는 땅을 찾아 바스락바스락 속살거리며 데굴데굴 굴러간다 시 2017.11.06
갈햇살/문경아제 참새도 피해가고 없다 눈이 부셔서 햇늙은 이 입이 헤 벌어진다 포근한 볕이 너무 좋아서 외로울 땐 나를 보러 오세요 침울할 땐 날 만나러 오세요 주섬주섬 옷을 줏어입고 대문을 나선다 "걸려들었네!" 상큼한 소리있어 귓전을 때린다 시 2017.10.20
청노루와 나그네/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며 느릎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왜일까? 왜 이럴까? 왜, 이 아침에 박목월 시인의 시, 청노루가 생각날까? 그래서일 것이다. 어젯밤에 블로그, '이 강촌의 일기' 에 들어가서 강촌일.. 시 2017.10.02
길/문경아제 밤 1자에 동그라미 한개가 붙은 늦은밤 가방 둘러매고 자전거에 올라앉아 퇴근길에 나선다 길가 풀섶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또르르 또르르 구슬프게 운다 가을이면 귀또리는 늘 그렇게 울어댔다 예나 지금이나 귀또리 울음소리는 변함없는데 내 목소리만 늙었다 된서리 맞고 하얗게 하얗.. 시 2017.09.20
누나생각/문경아제 까만 무명 치마저고리 입고 내 손목잡고 삽짝을 나서던 누나 누나처럼 까만 무명 바지저고리 입고 누나 손잡고 삽짝을 나서던 나 참 따사하고 고운 누나 손 누나 손은 아직도 곱고 따사하겠지 시 2017.09.18
달이 나를 기다린다/남진우 어느 날 나는 달이 밤하늘에 뚫린 작은 벌레구멍이라고 생각했다 그 구멍으로 몸 잃은 영혼들이 빛을 보고 몰려드는 날벌레처럼 날아가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달이 둥그러지는 동안 영혼은 쉽게 지상을 떠나지만 보름에서 그믐까지 벌레구멍은 점차 닫혀진다 비좁은 그 틈을 .. 시 2017.09.11
나팔수는 싫다/문경아제 앞산 그늘에서 산비둘기가 운다 구구구구 울지 않고 "적폐적폐!" 하고 운다 길가 감나무 밑에서 귀또리가 운다 귀똘귀똘 울지않고 "청산청산!" 하고 운다 엉거주춤 밤마실나온 범아제비가 귀또리에게 묻는다 "너희들은 입이 삐뚤어졌나 왜 그렇게 우냐?" 적폐청산 안 당하려면 너도 그렇.. 시 201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