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물따라 818

산다는 건 다 그런거다/문경아제

나이 일흔을 훌쩍 넘기고부터 집중력도, 기억력도 점점 떨어져만 갔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한참 동안 머리를 짜내어야 생각날 때도 있었다. 내 얘길 듣고 양평 글쟁이 강남 달이 이랬다. "문경아 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우.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구려. 동갑내기 강남 달도 그러하다오. 신의 섭리를 우리 인간이 어쩐단 말 이우?" 동갑내기 양평 글쟁이 강남 달은 블로그에서 만난 글친이다. 강남 달은 내 글방에 들리면 종달새처럼 조잘대다 가곤 했다. 그렇게 쾌활했던 강남 달이 옆지기를 여의고나더니 정말 달라졌다. 자신은 아니라지만 이 세상 온갖 서글픔과 외로움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는 듯 보였다. 우리 집사람은 심장이 안 좋다. 자다가도 숨이 가쁘다고 한다. 그럴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언젠가 ..

길따라 물따라 2020.10.18

강가에 서서/문경아제

해저문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갈대가 운다.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둠으로 덮이자 갈대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운다. 하얀 솜꽃 날리던 억새도 갈대 따라 운다. 저네들이 우는 것은 밤기온이 차가워서가 아니요 무서워서도 아닐 것이다. 가을밤 쓸쓸한 밤을 지새우기가 서러워, 외로워 저렇게 울고 있을 것이다. 갈대와 억새가 울건 말건 강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내달린다. 저 네들의 맘을 정선아리랑에 담아 하늘로 띄워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정선 같이 살기 좋은 곳 놀러 한 번 오세요 검은 산 물밑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맨드라미 줄 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 앞 남산 철쭉꽃은 강산이 붉어 좋다 정선의 구 명은 무릉도원이 아니냐 무릉..

길따라 물따라 2020.10.02

하늘1

오늘 오후 네시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올려다본 하늘입니다.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습니다. 구름은 등 떠밀어주는 바람이 없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일지 않으면 구름은 연료 떨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밝은 햇살이 포근합니다. 전형적인 구월 하늘입니다. 제비 한 마리 날아다니면 비둘기 노랫소리 들리면 더 멋스러울 텐데, 제비도 비둘기도 나래 쉼 하는가 봅니다. 그래, 쉬는 김에 날개 접고 푹 쉬거라.

길따라 물따라 2020.09.13

영주 휴천동성당

며칠 전 시내(市內)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휴천동 성당에 들려봤다. 주일도 아닌 평일이었다. 성당(聖堂)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곳, 성소(聖所)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아멘" 성호를 그은 뒤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드리는 기도였다. 성당에 안나 간지가 까마득하다. 그래도 가물에 콩 나듯 성당을 지날 때엔 간혹 들린다. 기도 양식이 맞지 않을지라도 맘 쓰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순간 나는 허공에 있다. 하느님, 탕자의 기도를 받아주소서. 휴천동 성당의 길주소는 영주시 지천로 194번 길이다.

길따라 물따라 2020.08.27

접시꽃을 만나다/문경아제

수년 전부터 이맘때면 연정을 나눴던 연분홍빛 접시꽃을 만나보려고 며칠 동안 홈플러스 뒷골목을 헤맸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다. 길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 화사한 연분홍빛 접시꽃을 만났다. 꽃은 늘 있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길눈이 어두운 내가 쉬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첫사랑 고운 님을 만난 듯이 반가웠다. "찰칵찰칵!" 폰의 셔터를 눌러 제쳤다. 곱게 나와야 할 텐데.

길따라 물따라 2020.07.01

모녀/문경아제

젊은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간다. 세발자전거에 기다랗게 손잡이가 달린 다목적 유모차다. 자전거엔 꼬맹이 공주님이 앉아계셨다. 근데 그 공주님 무에 그리 부아가 낳는지 "앙앙!" 울면서 간다. 공주님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엄마는 달랜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속이 상했든지 엄마는 공주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댄다. 그러나 공주님은 떼를 쓰며 울뿐 울음을 그칠 기세가 아니다. 엄마도 지지안으려는 듯 유모차에서 아기를 덜렁 들어내더니 길 위에 세워놓는다. 그리고 엄포를 준다. 울음 안 그치면 때워놓고 가겠다고. 애기도 엄마에게 지기 싫은 모양이다. 누가 이기나 끝장을 보려는 듯 계속 울어댔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 했다.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엄마는 아기를 번쩍 들어 유모차에 태운다. ..

길따라 물따라 2020.05.15

불장난/문경아제

30년이 훨씬 넘은 옛날 얘기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황종우라는 직장 후배가 살고 있었다. 그 친구에겐 다섯 살 난 이름이 윤우라는 개구쟁이 사내아이가 있었다. 봄날이었다. 서천둔치 언덕길을 따라 어느 양봉업자가 가지런히 벌통을 내다 놓았다. 근데 고 맹랑한 윤우녀석이 비슷한 또래 놈과 얼려 바싹 마른 잔디밭에 불을 싸지르고 말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불길에 부채질을 해댔다. 봄 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잔디밭을 까맣게 태우고 불길은 잡혔다. 벌통안 벌들은 타 죽거나 연기에 질식되었고, 약삭빠른 놈들은 잽싸게 도망질을 해서 목숨을 구했다. 그 친군 그일로 양봉업자에게 30만 원을 배상했다.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이태원 발 코비디 19가 나라 이곳저곳에 도깨비불을 싸지르고 ..

길따라 물따라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