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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김상옥

비오자 장독간에 봉숭아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두고 볼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며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니 해마다 여름이 오고 봉숭아가 곱게 필즘이면 떠오르는 시조입니다. 예전엔 이런 노래도 불렀답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시조 2021.07.06

오는 봄 가는 봄/문경아제

봄은 누구에게 들킬세라 땅에 납작 엎드려 살살 기어서 온다 봄은 택지에 살고 있는 시집간 우리 집 애물단지 딸내미처럼 소리 없이 살짝쿵 온다 봄은 우리 집 애물단지 딸내미와 사촌 사이다 해대는 짓똥머리가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산과 들에 꽃불 질러놓고 그냥 달아나는 봄이나, 늙은 어미 가슴에 온갖 잔소리 퍼부어대고 가는 우리 집 딸내미나 그놈이 그놈이다 언제 갔는지 도둑놈처럼 가고 없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도 없는 두 놈은 발그스름한 얼굴조차 닮았다

2021.04.05

눈내리는 겨울밤 얘기한토막/문경아제

우리 집 큰 손녀딸이 유치원 다닐 때였답니다. 이가 아파 아빠와 함께 치과에 다녀오너라고 유치원에 결석을 했나 봅니다. 이튿날 선생님이 "김신우, 어제 왜 결석했니?"라고 하시자 우리 집 맹랑한 큰 손녀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네, 선생님! 엄마와 아빠 동생과 함께 김밥 싸가지고 소풍 갔다 오느라고 결석했습니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날 소풍 갔다 오너라고 유치원 결석했다고 하네요. 새빨간 거짓말이 아닌 새하얀 거짓말이지요. 요즘도 큰 손녀딸은 하얀 거짓말 잘합니다. 할아버질 닮아 욕도 잘합니다.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 있는 우리 집 큰 손녀딸은 열네 살 중학 1학년이랍니다. 할아버지는 소백산 동쪽 아랫 고을 경북 영주에 살고 있답니다. 할머니와 둘이서요. 신우와 시우, 두 손녀딸이 무척 보..

아이들/문경아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별에 별 녀석이 있습니다. 우리 집 막둥이는 어릴 적 아명(兒名)이 곰돌이었습니다. 꽃동산 뒷동네에 살 때 곰돌이는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습니다. "퐁당퐁당!" 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곰돌인 숟가락이고 뭐고 손에 잡히는 데로 하수도 구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녀석은 앞집에 사는 또래 동무인 경진이와 함께 꽃동산 로터리 앞에 나가 춤추기 일쑤였습니다. "곰돌이캉 경진이캉 꽃동산 로터리에 앞에서 춤추고 있니대이. 끄잡고 올라해도 날다람쥐 맨치로 얼마나 약빠른지 당최 잡을 수가 있어야지." 골목 맞은편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가 그렇게 일러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한정 다리 밑에 이웃들과 함께 소풍가서였습니다. 잘 놀고 있는 영일이를 우리 집 막내 곰돌이가 집..

일상이야기 2020.12.11

산다는 건 다 그런거다/문경아제

나이 일흔을 훌쩍 넘기고부터 집중력도, 기억력도 점점 떨어져만 갔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한참 동안 머리를 짜내어야 생각날 때도 있었다. 내 얘길 듣고 양평 글쟁이 강남 달이 이랬다. "문경아 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우.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구려. 동갑내기 강남 달도 그러하다오. 신의 섭리를 우리 인간이 어쩐단 말 이우?" 동갑내기 양평 글쟁이 강남 달은 블로그에서 만난 글친이다. 강남 달은 내 글방에 들리면 종달새처럼 조잘대다 가곤 했다. 그렇게 쾌활했던 강남 달이 옆지기를 여의고나더니 정말 달라졌다. 자신은 아니라지만 이 세상 온갖 서글픔과 외로움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는 듯 보였다. 우리 집사람은 심장이 안 좋다. 자다가도 숨이 가쁘다고 한다. 그럴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언젠가 ..

길따라 물따라 2020.10.18

갈하늘이 손짓한다/문경아제

길가 저 가로수 잎들도 이제 곧 빨갛게 노랗게 물들 것이다. 뉘 집 감나무에 감이 익어간다. 익어가는 감과 함께 가을도 깊어간다. 해마다 이맘때면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물색없이 곱기 때문이다. 길가 포차와 마트에서 사가지고 온 어묵 두어 꼬지와 막걸리다. 귀가할 때까지 먹어야 할 길냥식이고 술이다. 지인(知人)이라도 만난다면 주태백인 줄 알겠다. 자연과 벗할 때 막걸리 두어 잔 마신다. 인터넷에서 슬쩍한 코스모스 꽃밭이다. 곱다 참 곱다. 주위가 어둠으로 덮힌다. 귀가할 시간이다.

강가에 서서/문경아제

해저문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갈대가 운다.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둠으로 덮이자 갈대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운다. 하얀 솜꽃 날리던 억새도 갈대 따라 운다. 저네들이 우는 것은 밤기온이 차가워서가 아니요 무서워서도 아닐 것이다. 가을밤 쓸쓸한 밤을 지새우기가 서러워, 외로워 저렇게 울고 있을 것이다. 갈대와 억새가 울건 말건 강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내달린다. 저 네들의 맘을 정선아리랑에 담아 하늘로 띄워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정선 같이 살기 좋은 곳 놀러 한 번 오세요 검은 산 물밑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맨드라미 줄 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 앞 남산 철쭉꽃은 강산이 붉어 좋다 정선의 구 명은 무릉도원이 아니냐 무릉..

길따라 물따라 2020.10.02

하늘1

오늘 오후 네시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올려다본 하늘입니다.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습니다. 구름은 등 떠밀어주는 바람이 없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일지 않으면 구름은 연료 떨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밝은 햇살이 포근합니다. 전형적인 구월 하늘입니다. 제비 한 마리 날아다니면 비둘기 노랫소리 들리면 더 멋스러울 텐데, 제비도 비둘기도 나래 쉼 하는가 봅니다. 그래, 쉬는 김에 날개 접고 푹 쉬거라.

길따라 물따라 2020.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