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문경아제 김동한 하얀 눈 속에 파아란 보릿싹들이 서로 등기대고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학교갔다 돌아오는 개구쟁이들 흰 눈밭에 드러누워 "찰칵!" 사진 한 장씩 박고 책보 어깨에 비스듬히 둘러매고 집으로 냅다 달음박질친다. 아이들은 저 멀리 달아났는데 눈밭 어디에서 재잘대는 소리 들려온다. "저녁.. 동시 2015.09.17
상생/문경아제 전후좌우 아래위로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남의 집 곳간 털어가는 떼강도들 붕붕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도적질에 혼을 뺏긴 백주대낮 간 큰 무뢰배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던가 곳간 텅텅 비었는데 꽃들의 미소가 저리 화사한 걸 보면 강도떼에게 얻은 것도 많은 모양. (2014.4,15.) 시 2015.09.15
목고개/문경아제 눈 감으면 늘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고개 잠 못 이루는 까만 밤엔 눈 감고 달려가 쉬었다 오는 고개 젊은 날의 때 묻지 않은 내 영혼이 하얀 낮달 되어 흐르는 고개 죽어서도 참하 못잊을 몹쓸 놈의 고개. (2014.12.31) 시 2015.09.15
어머니2/문경아제 밤하늘엔 별들이 촘촘히 떠있습니다. 빠알간 아기별, 파아란 누나별, 샛노란 엄마별, 커다란 주황색 아버지별들로 빼곡히 들어찬 밤하늘엔 조약돌 한 알 올려놓을 자리도 없습니다. 앞산 위 동쪽 하늘엔 빛이 바래진 할머니별이 허리가 잔뜩 굽은 채 지팡이 짚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 시 2015.09.15
여백(餘白)/문경제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마을풍경화를 그려오라는 방학숙제를 내셨다. 예전 아이들은 방학이면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시절엔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닦달도 요즘 보다는 훨씬 덜했다.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맘껏 노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보니 방학숙제는 늘.. 수필 2015.06.01
시인은/문경아제 서산에 핀 빨간 저녁놀에 찔끔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나뭇 고개 마루 위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매서운 풍기바람 못 내려오게 두 팔 벌리고 서있는 돈키호테다 담 밑에 앉아있는 길고양이 보고 어이, 춥지? 하고 말 걸어 보는 사람이다 시 2015.05.30
다락을 치우며/문경아제 나는 건달이다. 그렇다고 팔자 느긋한 백수건달은 못되고 그저 바람처럼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반건달이다. 백수건달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지만 반건달은 직업도 있고 가솔들을 부양할 줄도 안다. 백수의 안사람들은 아예 남편을 포기했지만 반건달의 안식구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 다락을 치운다고 며칠 전에 집사람으로부터 통고를 받았다. 친구들로부터 고스톱 치자고 전화라도 올라치면 또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집사람은 작업하기 전에 아예 오금을 박는다. "다락청소 끝날 때 꺼정은 꼼짝 못하니데이!" 다락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8년 전에 청소를 하고 안했다니 그럴만도 했다. 이불보따리, 각종 그릇, 옷보따리 같은 세간들로 다락 안이 가득찼다. 이불이나 옷보따리는 위에서 떨어뜨리면 되지만 무게가 나가는 세.. 수필 2015.05.30
겨울이야기1/문경아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목이 푹 빠질 만큼 눈이 내렸다. 내릴 만큼 내렸는데도 눈은 쉼 없이 계속 내린다. 순백(純白)의 눈도 욕심은 있나보다. 뜨거운 정열과 낭만, 무언가 그리움으로 젊은 가슴을 가득 채웠던 청춘의 시절! 눈이 내릴 때면 그것도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면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었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몸을 맡기고 발길닿는 데로 지향없이 떠나보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피 끓던 젊은 시절의 꿈같은 얘기일 뿐, 몸 따로 마음 따로 몸과 마음이 불협화음을 내는 나이든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져간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 아파트관리일을 하고 지내자니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눈은 양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 종가래로 눈을 치우고 마을진.. 수필 2015.05.28
고물상 노트북 다리는 덜렁덜렁 앞 마당 자전거는 삐걱삐걱 내 무릎은 새큼새큼 집사람 걸음걸이는 잘쑥잘쑥 "에그, 내가 못살아 가스렌지도, 전자렌지도, 세탁기도, 사람도, 마캉 고물 다 됐네!" 거실을 가로지르는 아내 볼멘 소리 귓등에 쟁쟁 시 201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