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우(初雨)3/문경아제 구구구구 자식죽고 구구구구 계집죽고 앞마당에 매어놓은 암소죽고 구구구구 이승의 연(緣) 끊지 못해 저리 우는 홀아비 넋. 개똥개똥 개똥불이 마당에 등불 켜고 별님이 사다리타고 밤마실 내려오면 보랏빛 모깃불 연기 초가삼간 휘감는다. 초사흘밤 쪽달하고 서쪽하늘 저 별님은 사랑.. 시조 2015.06.19
초우(初雨)2/문경아제 아랫목엔 앓는 아기 윗목에는 푸닥거리 아침에 눈떠보니 애기 얼굴 안 보인다 울 아기 가녀린 혼불 초가삼간 떠나간 듯. 이 밤도 소쩍새는 피 토하며 울어대고 산비둘기 설운 노래 어메가슴 멍드는데 까만 밤 밝혀보려고 박꽃은 피나보다. 나이 들고 생겨버린 객쩍은 버릇 하나 밤하늘 쳐.. 시조 2015.06.11
여백(餘白)/문경제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마을풍경화를 그려오라는 방학숙제를 내셨다. 예전 아이들은 방학이면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시절엔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닦달도 요즘 보다는 훨씬 덜했다.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맘껏 노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보니 방학숙제는 늘.. 수필 2015.06.01
시인은/문경아제 서산에 핀 빨간 저녁놀에 찔끔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나뭇 고개 마루 위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매서운 풍기바람 못 내려오게 두 팔 벌리고 서있는 돈키호테다 담 밑에 앉아있는 길고양이 보고 어이, 춥지? 하고 말 걸어 보는 사람이다 시 2015.05.30
다락을 치우며/문경아제 나는 건달이다. 그렇다고 팔자 느긋한 백수건달은 못되고 그저 바람처럼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반건달이다. 백수건달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지만 반건달은 직업도 있고 가솔들을 부양할 줄도 안다. 백수의 안사람들은 아예 남편을 포기했지만 반건달의 안식구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 다락을 치운다고 며칠 전에 집사람으로부터 통고를 받았다. 친구들로부터 고스톱 치자고 전화라도 올라치면 또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집사람은 작업하기 전에 아예 오금을 박는다. "다락청소 끝날 때 꺼정은 꼼짝 못하니데이!" 다락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8년 전에 청소를 하고 안했다니 그럴만도 했다. 이불보따리, 각종 그릇, 옷보따리 같은 세간들로 다락 안이 가득찼다. 이불이나 옷보따리는 위에서 떨어뜨리면 되지만 무게가 나가는 세.. 수필 2015.05.30
겨울이야기1/문경아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목이 푹 빠질 만큼 눈이 내렸다. 내릴 만큼 내렸는데도 눈은 쉼 없이 계속 내린다. 순백(純白)의 눈도 욕심은 있나보다. 뜨거운 정열과 낭만, 무언가 그리움으로 젊은 가슴을 가득 채웠던 청춘의 시절! 눈이 내릴 때면 그것도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면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었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몸을 맡기고 발길닿는 데로 지향없이 떠나보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피 끓던 젊은 시절의 꿈같은 얘기일 뿐, 몸 따로 마음 따로 몸과 마음이 불협화음을 내는 나이든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져간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 아파트관리일을 하고 지내자니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눈은 양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 종가래로 눈을 치우고 마을진.. 수필 2015.05.28
고물상 노트북 다리는 덜렁덜렁 앞 마당 자전거는 삐걱삐걱 내 무릎은 새큼새큼 집사람 걸음걸이는 잘쑥잘쑥 "에그, 내가 못살아 가스렌지도, 전자렌지도, 세탁기도, 사람도, 마캉 고물 다 됐네!" 거실을 가로지르는 아내 볼멘 소리 귓등에 쟁쟁 시 2015.05.28
목탁소리/문경아제 요즘엔 시주를 하러 다니는 탁발승(托鉢僧)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옛날 어릴 적, 고향마을에는 스님들이 참 많이 찾아오곤 했다. 옛날, 시골에서는 낮에는 거의 삽짝을 걸지 않았다. 사람들은 열린 삽짝 안으로 들어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는 스님에게 살아가는 형편껏 시주를 했.. 수필 2015.05.28
궤적(軌跡)/문경아제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힌 국제시장 점포 위를 너울너울 날아다닌다. 부두에 떠있는 커다란 배를 바라보며 덕수(황정민 분)는 모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내 영자(김윤진 분)에게 묻는다. "니 내 꿈이 뭐였는지 아나?" "뭐였는데요?" "저기 떠있는 저런 큰 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게 내 꿈이었던 거라. 니 꿈은 뭐였는데?" "내 꿈은 현모양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부부는 세월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첫 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6.25내전 앞에 조국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헐벗은 조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은 12월 19일 평양을 함락했다. 여.. 수필 201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