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07

다락을 치우며/문경아제

나는 건달이다. 그렇다고 팔자 느긋한 백수건달은 못되고 그저 바람처럼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반건달이다. 백수건달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지만 반건달은 직업도 있고 가솔들을 부양할 줄도 안다. 백수의 안사람들은 아예 남편을 포기했지만 반건달의 안식구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 다락을 치운다고 며칠 전에 집사람으로부터 통고를 받았다. 친구들로부터 고스톱 치자고 전화라도 올라치면 또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집사람은 작업하기 전에 아예 오금을 박는다. "다락청소 끝날 때 꺼정은 꼼짝 못하니데이!" 다락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8년 전에 청소를 하고 안했다니 그럴만도 했다. 이불보따리, 각종 그릇, 옷보따리 같은 세간들로 다락 안이 가득찼다. 이불이나 옷보따리는 위에서 떨어뜨리면 되지만 무게가 나가는 세..

수필 2015.05.30

겨울이야기1/문경아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목이 푹 빠질 만큼 눈이 내렸다. 내릴 만큼 내렸는데도 눈은 쉼 없이 계속 내린다. 순백(純白)의 눈도 욕심은 있나보다. 뜨거운 정열과 낭만, 무언가 그리움으로 젊은 가슴을 가득 채웠던 청춘의 시절! 눈이 내릴 때면 그것도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면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었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몸을 맡기고 발길닿는 데로 지향없이 떠나보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피 끓던 젊은 시절의 꿈같은 얘기일 뿐, 몸 따로 마음 따로 몸과 마음이 불협화음을 내는 나이든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져간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 아파트관리일을 하고 지내자니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눈은 양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 종가래로 눈을 치우고 마을진..

수필 2015.05.28

궤적(軌跡)/문경아제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힌 국제시장 점포 위를 너울너울 날아다닌다. 부두에 떠있는 커다란 배를 바라보며 덕수(황정민 분)는 모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내 영자(김윤진 분)에게 묻는다. "니 내 꿈이 뭐였는지 아나?" "뭐였는데요?" "저기 떠있는 저런 큰 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게 내 꿈이었던 거라. 니 꿈은 뭐였는데?" "내 꿈은 현모양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부부는 세월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첫 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6.25내전 앞에 조국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헐벗은 조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은 12월 19일 평양을 함락했다. 여..

수필 2015.05.26

골목길/문경아제

초저녁, 골목길에 어둠이 내린다. 하나 둘 가로등에 불빛이 찾아든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지 골목길이 온통 떠나갈 듯이 시끌벅적하다. 어디 숨기라도 하는 양, 몇 녀석은 후다닥 뛰어가는 모양이고 남은 한 녀석은 "일, 이, 삼, 사, 오!"라고 외치며 숫자를 센다. 아마도 숨바꼭질을 하는 모양이다. 옛날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할 땐 술래는 눈을 꼭 감고 벽이나 나무에 붙어 서서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라고 숫자를 헤아리던지 아니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외쳐대었다. 그런데 조금 전, 골목길에서 술래가 된 꼬마 녀석은 "일, 이, 삼, 사, 오!" 하며 큰 소리로 또박또박 숫자를 세는 것으로 보아 세월 따라 숨바꼭질 술래의 숫자 세는 방법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한 것 같다...

수필 201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