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골목길/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5. 5. 26. 15:40

  초저녁, 골목길에 어둠이 내린다. 하나 둘 가로등에 불빛이 찾아든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지 골목길이 온통 떠나갈 듯이 시끌벅적하다. 어디 숨기라도 하는 양, 몇 녀석은 후다닥 뛰어가는 모양이고 남은 한 녀석은 "일, 이, 삼, 사, 오!"라고 외치며 숫자를 센다. 아마도 숨바꼭질을 하는 모양이다.

  옛날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할 땐 술래는 눈을 꼭 감고 벽이나 나무에 붙어 서서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라고 숫자를 헤아리던지 아니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외쳐대었다. 그런데 조금 전, 골목길에서 술래가 된 꼬마 녀석은 "일, 이, 삼, 사, 오!" 하며 큰 소리로 또박또박 숫자를 세는 것으로 보아 세월 따라 숨바꼭질 술래의 숫자 세는 방법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한 것 같다.

  근무가 격일제이고 또 비번일 때는 밖에서 놀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다 보니 초저녁, 골목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집사람 말에 의하면 벌써 며칠째 되었단다. 골목길이 저렇게 씨끄럽게 변한 것이.

  아마도 봄방학을 맞아 골목길 맞은 편, 연립주택 어느 집에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이나 딸네 집에서 꼬마 손님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 같다. 그래, 골목길을 저처럼 시끄럽게 하는 주범(主犯)들은 틀림없이 그 녀석들일 것이다.

  그렇게 왁자지껄하던 아이들은 밥 때가 훨씬 지나서야 배가 고팠던지 집으로 물러간 듯하다.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가로등과 골목길이 지금쯤은 저녁상 앞에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이웃사촌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 옛날, 동네의 골목길은 집안의 마당이나 학교의 운동장과 함께 개구쟁이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아이들을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고샅에서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며 호연지기를 키우며 물씬물씬 커갔다. 못 치기를 하던 아이들 손가락은 못에 파여 늘 피가 질금질금 흐러곤 했다. 한 겨울 골목길에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의 손등은 잘 씻지 않아서 묵은 때가 덕지덕지 끼어있곤 했다.

  골목길은 학교 교실이나 운동장, 초가집 마당과 함께 이제는 6, 7십대의 노인네가 되어버린 세대들의 파란 꿈이 자란 곳이다. 노인네들의 그 꿈은 이젠, 페교가 되어버린 시골 학교의 운동장에, 폐가가 되어버린 시골집 안마당에, 아이들 소리 들리지 않는 고향마을의 골목길 속에 고이 묻혀 전설 되어 흐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아름다운 전설은 그저 아는 사람들만이 알뿐이다. 

  오늘날, 골목길은 거의 대부분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그것은 시골의 골목길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아주 비현실적인 얘기지만 골목길은 그냥 흙으로 남아있었으면 퍽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축성이라곤 조금도 없고 돌덩이나 다름없는 딱딱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 위를 웬만큼 걷다보면 다리가 쉬 피로함이 느껴진다. 골목길이라도 흙으로 덮여있다면 하루 종일 혹사당했던 우리들의 다리가 집 가까운 골목길에나마 조금은 편안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흙길은 딱딱하지 않고 신축성과 부드러움이 있으니 그 신축성과 부드러움은 바로 편안함으로 귀결(歸結) 되기 때문이다. 또, 흙길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이 놀다가 넘어져도 별로 다치지도 않을 테고 구수한 흙냄새 맡아가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꿈을 키워간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그 옛날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밤 열시쯤 되었나 보다. 이 시간쯤엔 이웃사촌간이 가로등과 골목길은 서로 어울려 밤참이라도 들고 있으리라.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잡고 느릿느릿 거니시는 골목길! 담벼락엔 멍멍이, 꼬꼬닭, 아기 오리, 예쁘장한 꼬마 공주님이 그려지고 창문 앞 나뭇가지에 새들이 날아와 노래하고 밤엔 가로등이 파수를 보고 달빛이 고요히 흐르는 아늑하고 포근한 정이 넘치는 골목길!

  '집 앞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서 서천, 뒷산으로 넘어가는 홍시 같은 해를 바라볼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나의 모자란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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