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樹下/金炳淵(김삿갓) 二十樹下 三十客 四十村中 五十食(이십수하 삼십객 사십촌중 오십식) 人間豈有 七十事 不如歸家 三十食(인간기유 칠십사 불여귀가 삼십식) 스무나무 아래 낯선 나그네여. 망할놈의 동네에서 쉰 밥을 주는구나.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집에 돌아가 선 밥 먹기만 못 하구나. .. 시 2016.08.22
우물/문경아제 맷방석 열개만큼 큼직한 동그라미 안에는 파란 하늘이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 속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있었습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뭉게구름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재잘거렸습니다 조그만 계집아이가 물을 길으려고 두레박을 동그라미 속으로 던졌습니다 두레박은 아이.. 시 2016.08.21
바닷가에서/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시 2016.08.21
순간의 꽃/고은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시 2016.08.21
사는 게 시시하네/이나영 시를 쓰면 뭐가 좋니 시집내면 돈이 되니 쓸 수밖에 없으니까, 먹고 사는 길은 아냐, 단숨에 발가볏겨진 그말앞에 가만섰다 술 한잔 되지 못한 몇 마디는 채워넣고 독한 것 내뱉으며, 눈을 한 번 치켜떤다 그래도 미끄덩하며 뭔가 빠져나온다 시 2016.08.19
초여름날 오후 성너머 동네 신씨 어른이 삿갓쓰고 손에 깔대기 말아쥐고 새터동네 뒷산을 오른다. 오뉴월 염천의 따가운 햇살이 삿갓꼭지에 사정없이 꽂힌다. "낼, 장들 보하러오시오. 바지게 지고 깽이나 사까래 가지고 오시오. 낼, 장들 보하러 오시오. 바지게 지고 깽이나 사끼래 가지고 오시오" 신씨.. 시 2016.08.13
별 샘가에 쓸어진 아내를 싣고 병원구급차는 안동병원으로 줄행랑친다 별빛이 흐른다 까만 별빛이 흐른다 집사람을 엎었다 재쳤다하며 진찰하던 의사 약물오남으로 인한 쇼크 같다며 엉덩이에 주사한방 쿡 새벽4시 안동병원문을 나선다 바깥공기가 싸늘하다 양말도, 신발도 신지 않은 아.. 시 2016.08.12
능소화/엄무선 여름 저녁이 하얀 개망초 사이를 어정어정 늦장 부리며 걸어와도 당신은 익숙한 시간에 발소리 앞세워 오지 않으실까 현관 앞에 귀 걸어 둡니다 기다림에 지칠 때쯤 왠지 닮은 듯한 기침 소리라도 귓전을 스쳐오면 바짝 곤두선 시신경이 현관 앞을 서성이다 섧게 돌아서곤 합니다 숱한 .. 시 2016.08.11
사랑단지 고것 참 뉘 집 손녀딸인지 하얀 나비보다 더 곱네 고것 참 뉘 집 손녀딸인지 바닷가 몽돌만큼 사랑스럽네 할아버지 스마트폰 빼앗아 엄마에게 문자 보내는 고것 참 뉘 집 손녀딸인지 못 말리는 떼쟁이네. 시 2016.08.10
다시 태어나도.1 창공을 훨훨 나는 새야 너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날개짓 맘껏 하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로 거듭나고 싶겠지 나도 그렇다네 내생(來生)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걸쭉한 막걸리 마셔가며 바람과 뜬 구름 벗하며 글 몇 줄 쓰며 늙어가는 그런 글쟁이로 살아가고 싶다네 이름 석자 .. 시 201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