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진자주빛 접시꽃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6. 6. 11. 19:52

 

 

 

 

 

 

 

 

옛날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고향마을 새터동네에는 접실어른이라는 안어른이 살고 계셨다.

접실어른은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50대 후반의 할머니이셨다. 접실어른은 30대중반쯤된 며느리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딸 승희와 손자 승일이, 일곱살에 접어던 꼬맹이 손녀딸 승자와 함께 살아가고 계셨다.

아들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마을에서 총기오발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집안에 남정네가 없는지라 사는 것이 늘 어려워 보이던 그런 집이었다. 마을에서는 접실어른집을 '승일네집' 이라고불렀다.

승일네집은 손바닥만한 밭뙤기에 농사를 지으며 승일이 엄마가 틈틈이 묵이나 두부를 해서 팔아가며 근근히 살림을 꾸려갔다.

승일이 할머니, 접실어른은 화초를 좋아하시고 잘가꾸셨다. 좁다란 꽃밭에 백일홍, 키다리국화, 접시꽃 같은 꽃들이 가득했다. 그 여러 꽃들 중에서도 진자주빛 접시꽃이 가장 고왔다. 마을에서 접시꽃이 피어있는 집은 승일네집 밖에 없었다.

접시꽃은 아카시아와 찔레꽃, 밤꽃이 지고나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빨간 자주빛 접시꽃을 피우려고 밤이면 앞산 그늘에서 산비둘기가 구성지게 울어대곤 했다.

접실어른이 돌아가신지도 40년이 넘었고 승일네집이 이사를 가버린지 이미 오래이고 집이 뜯겨버린지도 30년이 지난듯 하다.

길가 연립주택 화단에, 어느집 담 아래에, 색색의 접시꽃이 곱게 피었다.

승희도, 승일이도, 승자도 가억하고 있을까? 그 곱던 진자주빛 접시꽃을 기억하고 있을까?

60여 년 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한폭 두폭 곱게 접어 가슴속에 갈무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인생길 잠시 쉬어갈 때 빙그레 웃음지으며 그때의 꽃, 진자주빛 접시꽃을 떠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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