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심성(心性)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6. 6. 19. 12:50

공무원 말년에 나는 수도검침원을 했었다.

여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렇게 무더운 날이었다.

그날도 왼 옆구리에는 검침부를 끼고, 오른 손엔 검침용 갈쿠리를 들고, 검침길에 나섰다.

어느 수용가 대문 앞에 서서 "수도검침왔습니다." 라고 외치며 대문을 두드렸다.어른들은 다 일하러 나간듯 초등학교5학년쯤 되어보이는 딸아이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허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절을 했다.

"그래, 방학이라 집에 있구나."

"예!"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듯 했다. 그랬던 아이가 잠시후 밖으로 나왔다. 아이의 손엔 물 한 잔을 담은 쟁반이 들려있었다.

"아저씨, 더운데 물 드세요." 아이는 생긋이 웃으며 물을 권했다.

"그래, 고맙구나." 아이가 건네주는 한 잔의 물은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맑은 물이었다.

나는 인간의 고운 심성(心性)은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온다고 믿는 사람이다. 저 어린 딸아이가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 땀흘리며 일하는 낯선 검침원에게 한 잔의 물을 권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니 그 아이도 이제 나이 설흔에 귀가 한 두개 붙었겠다. 그래, 분명 그 아이는 아이들 잘 키우는 심성 고운 새댁이 되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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