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찔레꽃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6. 5. 12. 18:30

 찔레꽃이 피었다. 찔레꽃은 아카시아꽃보다는 조금 늦게 피고 조금 늦게 진다. 피고 지는 시기가 좀 다를 뿐 두 꽃은 서로 닮았다. 닮은 점이 많다보니 찔레꽃은 아카시아꽃과는 사촌쯤 된다. 두 꽃은 닮은 구석도 많지만 확연히 틀린 점도 있다. 오월에 피어나는 봄꽃이라는 것과 꽃잎이 눈송이처럼 새하얗다는 것이 두 꽃 사이에 닮은 점이다. 또, 꽃에 독이 없기에 자신을 보호하고자 나무에 가시가 있다는 것도 서로 닮은 점이다.

 아카시아꽃 내음은 바람에 실려 멀리 가지만 찔레꽃 냄새는 그리 멀리 가지 않는다. 그것은 온 산을 온통 하얗게 뒤덮다시피 하는 아카시아꽃에 비해 산기슭이나 산아래 밭둑, 도랑 가에 외롭게 피어나는 찔레꽃은 쪽수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또, 매혹적인 아카시아꽃 향기에 비해 풋풋한 내음을 풍기는 찔레꽃은 향의 강도에서 아카시가꽃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꽃의 모양도 아카시아꽃은 조그만 버선 같지만 찔레꽃은 오각형으로 되어있다. 그러한 것들이 사촌지간 쯤 되는 두 꽃 사이에 틀린 점들이다.

 찔레꽃은 크기가 꽃 떨어진 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풋감만 하다. 찔레꽃은 하얀 하트 모양의 다섯개 꽃잎으로 이루어졌다. 다섯 개의 꽃잎이 한데 모인 한가운데 노란 금실 같은 수술이 빼곡히 박혀있다.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다. 꽃말처럼 찔레꽃은 조용한 꽃이다. 찔레꽃은 화려하지 않고 사람의 혼을 빼앗아 버릴 것 같은 고혹적인 향도 없다.

 찔레꽃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외롭게 피어난다. 찔레꽃이 피어날 때면 뻐꾸기가 울고 밤이면 소쩍새도 운다. 그 새들의 울음소리도 꾀꼬리나 종달새처럼 아름답지 않고 경쾌하지도 않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찔레꽃이 그러한 것처럼 그저 고독할 뿐이다. 찔레꽃은 가난과 외로움이 한데 어우러져 피어나는 서러운 꽃이다.

 어느 시인은 '풀꽃'이란 시에서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풀꽃도 예쁘다고 했다.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들여다보니 자그마한 찔레꽃도 퍽이나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던다.

 눈을 감아본다. 그 옛날, 우리 집 앞뒷집에 살던 옥희누나와 동희 누나가 환하게 웃음지으며 찔레꽃 무리 속에 박혀있다. 치렁치렁하게 땋은 삼단 같은 머리에 갑사댕기 물리고 물동이 이고 샘길을 오가던 누나들. 이제는 일흔을 넘긴 할머니가 되어버렸을 그 누나들이 어떻게 고운 모습 그대로 하얀 찔레꽃 속에 박혀있을까? 그러고 보면 찔레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기이(奇異)한 꽃이다.

 60년대 이전에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노인들이라면 누구나 경험을 했을 것이다. 긴 봄날, 산기슭 아래 도랑가를 싸다니며 달착지근한 찔레순을 꺾어먹던 그 아름다웠던 어린 날의 자유를 경험했을 것이다.

 찔레꽃 한 잎을 따서 입속에 넣고 자근자근 씹어본다. 풋풋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엇비슷하지만 한 움큼 따서 씹어 먹던 그 옛날의 그맛은 아니다. 왜일까? 입맛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고급스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람과 함께 입맛 또한 늙어버린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산모롱이에 서럽게 피어난 하얀 찔레꽃이, 풋풋한 내음이, 젊은 시절에는 그립지 않았다. 아니, 먹고 살기 바빴기에 그리워할 겨를조차 없었다.

 찔레꽃 한 잎을 따서 자근자근 씹어가며 산을 내려온다. "들리나, 들리나? 내 노래소리 잘 들리나?" "그래 그래 잘 들린다. 네 노래 참 곱다." 새들은 저희들 끼리 노래를 주고 받으며 흥에 겨워한다. 찔레꽃은 서러운데 새소리는 맑기만 하다. (201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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