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숙연한 맘으로 길을 나서다/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9. 6. 6. 14:37

 

 

 

 

 

 

 

 

 

 

 

 

 

 

 

 

 

 

현충일(顯忠日), 아침일찍 조기를 게양했다.

깃대 길이가 짧은지라 깃폭만큼은 아니고 적당하게 띄워서 게양했다.

아침 아홉시, 늦은 아침밥을 먹고 열시쯤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섰다.

현충일이라 숙연한 맘으로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어떤 사이비 진보주의자는 현충일을 없에고 대신 세월호 기념일로 대체하자고 인터넷댓글에 올려놓았다.

현충일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는 날, 국가기념일이 아닌가!

그러한 뜻이 담긴 현충일을 없에고 대신 세월호추모기념일로 대체하자니 그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뿐이다.

그래, 덜 떨어진 철부지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열받지 말고 마음 다잡아먹고 가던 길이나 가자.

 

길나서면, 홀릴릭 홀릴릭 울어대는 새도, 몇올 남지않은 내머리카락을 날리는 녹색바람도 만날 수 있다.

"홀릴릭 홀릴릭 울어대는 새는 콩알만 하다.

높다란 전깃줄에 앉아서 울어대는 그 새는 너무도 작아 앙증스럽기까지 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한곡조 뽑아대곤 그 콩알만큼 작은 새는 꼬리를 까닥이며 구름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상공회의소에서 얼마쯤 떨어진 세차장 집 화단에 피어난 진자줏빛,

곱디고운 분홍빛깔의 접시꽃은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화사하다.

그 집 접시꽃이 고와서 해마다 폰에 담아가곤 했었다. 담너머로 폰을 들이대고 도둑사진을 찍곤 했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고 그 고운 접시꽃을 폰에 담았다.

 


희야

그 옛날

군에서 제대하던 해

나는

열아홉 꽃띠 아가씨였던

너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너를 살포시 안으며

사랑한다고 했을 때,

너는 도리질을 했다

 

오빠때문에

울진 않았다며

도리질을 했다

 

진자줏빛접시꽃을

바라보다

세월 너머로 보았다

뉘 집

할머니가 되어버린

너를,

너만은 세월이 비켜가길

바랐는데

     문경아제의 시,「접시꽃 연정전문

 


희야, 세월이 한참 흐른뒤에야 알았다.

젊을 시절의 내가 얼마나 순수했던 가를.

단 한번의 사랑고백으로, "오빠 나도 오빨 사랑해요!"라며 답싹 안겨올 아가씨가

조선천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래,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그 옛날의 동화같은 사랑얘기를 부담없이 얘기하는 걸 보면.


불바위에서 조금 못미쳐에 있는 뉘 집 좁다란 화단엔 하얀접시꽃이 피어났다.

진자줏빛이나 연분홍빛깔의 접시꽃이 화사하다면 흰접시꽃은 단아하다.

자전거핸들을 서쪽으로 돌려본다.

뉘 집일까?

대단한 저택이다.

저택 담장엔 흰장미꽃이 가득하다.

오월장미라고 했다. 유월엔 장미가 시들고, 빛이 바랜다. 그러고보니 저택 담장을 가득 덮은 백장미도 퇴락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연립주택 어느 집 창아래엔 진자줏빛접시꽃이 몇송이 피어있다.

그집 주인장도 접시꽃을 퍽 좋아하나보다.

서영주를 둘러보고 홈마트에 가려고 신영주로 자전거핸들을 돌린다.

두부 한모와 3kg짜리 노랑설탕 한봉지와 사탕 한봉을 사기위해서다.

시장 잘못 봤다간 집사람에게 변당하기 일쑤다.

폰을 꺼내들고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본다.

"여보, 3kg짜리 노랑설탕 한봉과 두부 한모, 그라고 사탕한봉 사가면 되지."

"그래요."

노년의 하루는 그렇게 스리슬슬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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