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머니의 부엌/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9. 1. 31. 00:27

  옛날 어릴 적, 우리 집 부엌 부뚜막에는 솥 두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하나는 발솥이고 다른 하나는 옹달솥이었다. 커다란 발솥은 밥을  도맡아 지었고 발솥보다 훨씬 작은 옹달솥은 주로 국을 끓이는데 사용되었다. 솥들은 늘 까만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증조할머니 때부터 그러셨을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그 무쇠솥들을 부뚜막에 걸어놓고 달구고 식혀서 행주로 닦아냈을 것이다. 그리고는 들기름을 먹이고, 솥에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게 닦고 또 닦으셨을 것이다. 그러한 일, 들기름을 먹이고, 솥에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게 하는 일은 증조할머니부터 할머니를 거쳐 어머니 대까지 이어져왔을 것이다.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솥들의 그 윤기 속엔 집안 안주인들이 가족을 위해 흘렸던 땀과 정성이 듬뿍 배어들었을 것이다. 가족들 몰래 흘렸을 집안 여인네들의 하얀 눈물이, 홀로 삼켜버려야 했을 서러운 한(恨)이, 그 곱기만 한 윤기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1989년 6월, 어른들이 이곳 영주에 오셔서 합가를 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을 듬직하기만 한 무쇠솥들은 밥 짓고 국 끓이며 빨갛게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 속에 온몸을 맡겨가며 주인들을 먹여살려왔을 것이다.

 부엌 한 쪽 구석진 곳엔 커다란 물두멍이 땅속 깊숙이 밖혀있었다. 5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에 샘이 하나 밖에 없었고, 샘길은 꽤나 멀었다. 그러니 물 긷는 일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은 부녀자들은 물동이로, 남정네들은 물지게로 길어다 날랐다.

 여름에 가뭄이 들거나 추운 한겨울에 물길이 얼어버리면 마을에서는 뒷산 모퉁이를 돌아, 솔평 마을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넘어 미낭굴로 물을 길으러 가야했다. 커다란 바위 밑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미낭굴 샘물은 여름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고, 추운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았다. 뒷산 아래 모퉁이를 돌고 돌아 뾰족한 바위가 듬성듬성 박혀있는 꼬불꼬불 꼬부랑 고개를 넘어 가는 물길은 마을에서 어림잡아 7, 8백 미터쯤은 되었다. 부녀자들이 가기엔 힘든 길이라 미낭굴에 물 길으러 갈 때는 주로 남정네가 가곤 했다.

 처음으로 물지게를 지고 비틀거리며 물 두 통을 길어 온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길러 온 물 두통을 들어서 물두멍에 쏟는 자식을 보시고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아들 이제 장정됐네!" 라시며 무척 기뻐하셨다. 당신께서 서너번을 족히 이고 날라야 했은 물을 한 지게에 거뜬히 지고 온 아들이 퍽이나 대견하셨던 모양이셨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이 지금도 눈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 일을 거들던 누나는 열예일곱에 들면서부터 부엌일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그런 누나 뒤에 멀찍이 서서 대충 큰일이나 봐주시는 것 같았다. 나보다 일곱살 많은 누나는 내가 중학교2학년 때 시집을 갔다.

 부엌일을 도맡아 하던 누나가 시집을 가고 없으니 사내인 내가 어머니 일을 거들어야 했다. 샘에서 물을 길어오고, 나뭇가리에서 나무를 빼서 부엌에 들여놔주고, 굵은 나무는 때기 편하게 손도끼로 잘게 쪼개며 나는 그렇게 어머니 일을 거들곤 했다.

 어머니는 밥을 지어실 때, 솥에 쌀을 안친 뒤 아궁이에 불을 사르고 때면서 불길을 조정하셨다. 밥이 끓기 시작하면 고등(高等)불로 한참을 유지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타고 있던 나무를 아궁이 가장자리로 끄집어 내셨다. 밥에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밥에 뜸이 들 때엔 구수한 밥 냄새가 부엌문을 넘어서서 마당까지 서며 나왔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면 온 마을에 구수한 밥 내음이 가득했다.

 뜸이 제대로 든 밥에서 구수한 빕 내음이 나듯이 사람도 제대로 뜸이 든 사람에게서만 사람다운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면의 가치보다는 외면의 치장을 더 중히 여기는 현대인들은 뜸이 채 들지 않은 채 노년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그러한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기에 뜸이 채 들지 않은 인생의 밥을 익히려고 무진 애를 써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97년쯤엔가 I M F가 터지고 도(盜) 선생이 고향집 부엌에 있는 솥들을 죄다 떼어가 버렸다. 도선생은 고향집 부엌의 마지막 안주인이었던 어머니의 땀과 정성, 숨결과 한(恨)이 배어있는 그 귀중한 무쇠솥들을 훔쳐간 것이다. 근 삼대에 걸쳐 백여 년의 세월을 밥 짓고 국 끓여가며 집안 가솔들을 먹여살려왔을, 그 귀중한 무쇠솥들을 도선생은 훔쳐가고 말았다.  부엌 의 내면을 이루었던 솥들은 그렇게 도난 되었다. 안간힘 써가며 썰렁한 빈 집속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의 부엌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퇴락되어 갔다. (2013년 10월 15일. 200자 원고지 12매 3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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