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때, 집사람을 데리고 부석사에 갔다.
할일이 많다면 가지 않으려는 집사람을 억지러 끌고가다시피했다. 그기서부터 일이꼬인 것 같았다.
집사람과 함께 나란히, 환상의 길이라는 부석사진입로 '은행나무숲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무량수전 앞에 서서 가히 천하제일경(天下第一景)이랄 수 있는 소백산 영봉 위에 피어난 진분홍빛 저녁놀을 바라보고 싶어서였다.
매표소를 지나 진입로에 들어서자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무도 더러 있었다. 일주일만 빨리 왔어도 환상의 '은행나무숲길'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니 퍽이나 아쉬웠다.
진입로는 떨어져내린 노란 은행잎으로 비단길이 되어있었다. 우리 내외는 비단길을 걸으며, 폰의 샷을 누르며 산문(山門)을 향해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사진 찍는데 정신을 빼앗겨 점퍼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빠진 것을 몰랐다.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제대로 잠궈지않아 솟구쳐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지갑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bc카드와 병원진료카드, 문인회원증과 함께 37만 몇 천 원쯤 되는 현금이 들어있었다. 현금은 직장에서 추석 떡값 받은 것과 지난 생일날 딸아이로부터 받은 돈 중 남아있는 돈이었다.
딸아이는 가끔 그렇게 용돈을 주곤 했다.
우린, 발길을 되돌려 오던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표소에 들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얘기하고 혹시 습득물신고 접수 된것 없냐고 물어보았더니 없다고 했다. 지갑은 이미 물건너간것 같았다. 카드사에 연락해서 분실신고를 했다.
지값을 분실했으니 수중엔 돈 한푼 있을 리가 없었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져보았더니 오백원짜리 동전 다섯개와 백원짜리 일곱닢이 손에 들어왔다. 영주로 되돌아갈 버스여비는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맹추같은 집사람은 내 지갑만 믿고 돈 한푼 가져오지 않았다. 그게 바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턱밑에 수염이 나지않는 법이다.
순흥에 살고있는 소리꾼 정오순 시인에게 전화를 해 낭패담을 얘기했다.
정 시인이 말했다. "선생님, 그자리에 계시면 제가 영임이 보내드릴게요!"
영임씨는 오십대초반의 후배글쟁이다.
영임씨로부터 전화가 곧바로 걸려왔다.
"선생님, 여기 단산인데요 선생님 모시러 차돌려 올라갈게요."
선비촌에 근무하는 영임씨는 퇴근길이었고 했다.
"영임씨, 그럴 것 없어요. 버스타고 가면 되는 걸."
"아니예요 선생님, 제가 모시려갈게요."
그때였다. 집사람이 말했다. 저기 버스온다고.
"영임씨, 올 것 없어요. 저기 버스와요. 버스타고 갈게요."
"에그, 선생님! 그럼 전 곧바로 갈게요. 편히 가세요."
어둑어둑한 하늘가에서 들려왔다. 나를 일깨워 주시는 부처님의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불자가 아닌, 아주 농땡이 가토릭 신자인 내 귀에도 부처님의 옥음은 또렷이 들려왔다.
"중생(衆生)아, 성찰(省察)하며 살아가거라. 네딴엔 올곧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모양이다만 오만일뿐이다. 너도 잘알고 있잖으냐? 네가 죄인이란 것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잡고 있는 집사람 손은 퍽이나 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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