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고향마을에는 감나무가 참으로 많았다. 집집마다 한 두 그루씩은 있었고 대여섯 그루가 넘는 집도 있었다.
파란 가을하늘 아래 빨간 감을 주렁주렁 달고 서있는 감나무! 초가집 마당에는 암탉이 노닐고 검둥개는 옆집 누렁이가 얼씬거리자 부리나게 쫓아갔다. 음메음메에! 외양간 암소는 마실나간 송아지를 부르느라고 목이 다쉬었다.
눈감으면 환하게 떠오른는 그 옛날의 가을수채화가 눈물겹게 그립다.
감을 따실 때 아버지는 나무꼭대기에 붙어있는 여남개의 감은 꼭 남겨두셨다. 남겨진 감을 까치밥이라고 하셨다. "짐승도 하양 먹꼬 살아야제."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어셨다. 옛 어른들께서는 자연속에 묻혀 사시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자연으로부터 배웠으리라.
가을밤, 감 깎는날 밤에는 이웃에 사시는 안어른들이 집으로 몰려오곤 하셨다. 감광주리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감을 깎았다. 사각사각 감껍질 벗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감을 깎으며 무료함을 달래시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힘든 모내기의 피곤함을 잊어버리려고 불러대던 농요와 같았을 것이다. 청이 좋은 소목골어른이 붕우가를 읊으셨다. 붕우가, 귀녀가라고 하며 옛날 부녀자들이 안방에서 읊던 가사, 고전문학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는 내방가사였다.
어하세상 붕우들아 이내 말쌈 들어보소...소목골어른의 낭랑한 목소리가 감껍질 벗겨지는 소리를 압도한다. 청중은 숙연해 진다. 어릴적 어깨 너머로 들은 그 내방가사를 젊은시절엔 꽤 많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 다 잊어버렸다.
그 옛날의 꿈속에서 부스스 깨어나서 현실로 돌아간다. 4시가 넘었다. 쓰레기집하장에 나가보려고 초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갈하늘은 오늘도 물색없이 곱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