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洑)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강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한다. 못자리를 하기 전부터 보를 하기 시작하면 가뭄이 심할 때는 온 여름 내내 보 보수가 잦곤했다.
지금이야 시골 어느 마을을 가든지 엠프시설이 안 된 마을이 없고, 집집마다 전화가 없는 마을이 없다. 그러나 그 옛날 5, 6십년대에는 꿈만 같았던 얘기였다.
보의 관리는 봇도감이 하였고, 봇도감 아래에 소임(所任)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소임의 임무는 언제 어느 시에 보를 한다고 알리는 일과 보하는 날 참석자를 대조하고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장들보 소임이라는 어른 행색이 너무도 기이하고 재미있어 지금도 눈감으면 훤히 떠오른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날이면 그 소임이란 어른은 삿갓 쓰고 휘적휘적 동네 뒷산에 올라 손나발을 만들어 입에다 대고 동네를 바라보고 냅다 소리를 질러댄다.
"낼 장들 보하러오시오. 지게에 바소가리 얹고 꽹이나 사까래 가지고 오시오. 낼 장들 보하러 오시오. 지게에 바소가리 얹고 꽹이나 사까래 가지고 오시오."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소리는, 오시오오오- 하고 한참이나 여운(餘韻)을 남기곤 했다.
한낮, 집안 식구 모두가 낮잠에 빠져들었다. 혼자 깨어나서 마루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놀고있던 손자 녀석이 똥을 싼 모양이다. 자지 않고 실눈을 떠고 손자를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가 손자녀석의 엉덩이를 철썩 때리고는 엉덩이를 닦아준다. 그리곤 마루 끝에 서서 개를 부른다. "워리워리!" 워리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물결 퍼지 듯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위리새끼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마루위 똥을 말끔히 치운다.
겨울밤, 어머니는 주무시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신다. "철철철 처르르 철철!"콩나물시루 물흐르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트린다. 서너 바가지의 물이 다 흐르고 난 뒤, 맨 마지막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방울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퐁퐁 쪼록 퐁, 쪼록 쪼록 포옹!" 참 곱다.
가을날 저녁, 석유기름통을 진 석유장수할아버지가 골목길을 돌아간다. "석유기름 사시오. 석유기름이오. 석유기름 사시오. 석유기름이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뒷골목을 휘돌아간다. 감이 빨갛게 익어간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황혼빛에 젖어던 하늘위로 올라간다.
할아버지는 눈이 좀 어두웠다. 그래서였을까. 깔대기를 대고 기름을 따루는데도 그 아까운 석유기름을 조금씩 땅바닥에 흘리곤 하셨다. 옛 어른들은 기름 한 방울도 아까워 하셨다. 해서, "불 꺼, 불 꺼!"를 입에 달고 사셨다.
가을밤! 이웃에 사시는 안어른들이 우리집 안방에 모여앉아 감을 깎는다. 한실어른, 소목골어른, 한밤실어른, 한국아지메가 죽 둘러앉아 얘기꽃을 피우는데 감은 손에서 잽싸게 돌아간다. 참으로 신통한 재주를 가진 안어른들이다. 얘기가 좀 뜸해지면 듣기만 해도 숙연해지는 소목골어른의 내방가사가 이어진다. 내방가사는 규방가사라고도 한다. "어하 세상 붕우(朋友)들아 이내 말쌈 드러보소" 라고 시작되는 그 내방가사를 예전에 꽤나 외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거의 다 잊어버리고 몇줄만 기억하고 있으니 흘러버린 세월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 큰 동네 고향마을이 이제 십여 호가 조금 넘는 조그만 마을로 전락해버렸다. 보한다고 외쳐대던 갈라지는 듯한 소임 어른의 외침도, 고요한 겨울밤의 적막을 깨트리던 콩나물시루의 물방울 소리도, 세월 저편으로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석유기름 사시오!" 하고 외쳐대던 석유장수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목소리도, "불 꺼, 불 꺼!" 를 입에 달고 사셨던 옛 어른들의 아련한 목소리도 추억의 소리된지 몇 십년이 넘었다.
세월이 변함에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처연하고 고왔던 우리의 소리들! 이젠 6, 7십대의 노인네가 되어버린 그때의 아이들의 살팍한 가슴속에 터잡고 살아가는 우리의 소리들. 그 소리가 그리워 찔끔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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