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픽션

망각/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7. 10. 16. 11:13

어젯밤이었다.

롯데팬인 나는 야구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가 NC에게 9:0으로 완패했기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5전 3선승제에서 롯데와 NC는 2:2로 팽패한 대결을 벌렸었다. 오늘 마자막 게임에서 롯데는NC에게 그렇게 허망하게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믿었던 거포 이대호의 방망이도, 최준석의 방망이도, 대형아취를 그려내질 못했다. 해결사 손아섭의 배트는 계속 허공만 갈라댔다. 손아섭의 어제성적은 4타수 무안타였다.

롯데 타자들은NC선발투수 헤커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

"에라 이 멍청한 노무 자식들아 그걸 한방 못쳐!"

초소에서 틈틈히 TV를 통해 야구중계를 관전하면서 그렇게 고함을 몇번이나 질렀는 지 모른다.

운동선수들이 이렇게 팬들의 성원으로 쑥쑥 자란다면 글을 쓰는 글쟁이는 독자들이 보내주는 애정의 바탕 위에 글을 쓴다.

하객이 없는 혼례식장을 생각해보라.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혼례식장에 하객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독자없는 글쟁이란 하객없는 혼례식장과 같은 것이다.

 

예전, 마당위에 멍석깔아놓고 차린 초례청엔 하객들이 가득 했다. 하객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강아지도 기웃거렸고 외양간 안에서는 황소가 눈을 꿈벅이며 초례청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솔바람도, 포근한 갈햇살도, 초례청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생긋이 웃음지며 지나갔었다.

 

그것은 글쟁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하는 법칙이다. '독자들의 애정으로 글을 쓰는 것' 은 대가(大家)에게나 무명의 글쟁이에게나 하나같이 통용되는 법칙이다.

경기도 양평땅에 강촌이란 글쟁이가 산다. 강촌은 수필가다. 글을 참 잘쓰는 글쟁이다.

강촌의 글은 누에가 지은 누에고치와 같다.

상주농잠고등학교 잠업과를 나온 나는 누에박사다. 누에가 고치짓는 모습은 가히 예술이다. 입에서 가느다란 실을 술술 풀어내어 허리가 잘록한 고치를 짓는 모습은 누에가 연출하는 최상의 예술이다.

강촌과 누에가 다른 점이 있다면 누에는 입에서 뽑아내는 가느다란 실로 집을 짓지만 강촌은 가슴에서 자아올린 하얀 글실로 글집을 짓는 것이 다를뿐이다.

'그래, 내일은 강촌과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글감으로 삼아 글을 쓰자. 생일 하루 전날 올린 '생일' 이란 글에 '생일상을 차려주는 딸내미를 둔 문경아제가 부럽소이다' 라고 한, 강촌의 댓글도 알려야겠지.

 

아침에 눈을 떳다. 그런데 머리가 하얘졌다.

어제 생각해 두었던 글감들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올봄 어느날엔가 자고났더니 usb에 글 저장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과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말았다. 급기야 망각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저 하늘위 높은 곳에 계신 그 분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중얼거리실 것이다.

'그노무 자식아, 속 그렇게 씩이 쌌더니 자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