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서쪽 끝, 산아래에 부영아파트의 불빛이 반짝인다.
부영아파트엔 작년 겨울에 짝찾아간 우리집 애물단지 딸아이가 산다.
딸아이는 마흔을 세살이나 넘긴 마흔셋의 나이에 만혼을 했다. 집나가면 죽을줄 알았는지 결혼같은 것은 절대 안한다고 떼거지를 쓰는 것을 집사람이 처녀귀신은 못만든다며 윽박질러 쫒아내었다.
1971년 3월에 대한민국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나는 다음해인 1972년 3월에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이듬해 2월에 큰아이 국환이를 나았고 그 다음해인 1973년 9월에 딸아이 선아를 얻었다.
딸아이가 첫돌이 지나던 1974년 12월, 집사람이 "픽!" 하고 쓰러졌다. 영양실조였다. 기가막혔다. 엄시부모님 슬하에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달프다해도 밥을굶긴 것도 아닌데 영양실조라니 기가 막혔다.
알고보니 집사람은 그렇게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내력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집사람은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인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처형인 언니하고는 열한 살이나 차이가 났다. 엉석받이로, 딸을 화초처럼 키운듯 했다. 어릴 적 집사람은 쌀밥도 캑캑거리며 목구멍으로 넘기질 못했다고 했다.
강건너 마을인 집사람의 동네 옥산은 들 언저리에 있었다. 그러니 밭보다는 논이 훨씬 많았다. 큰산 기슭에 있는 우리 동네 새터는 그 반대였다. 논보다는 밭이 훨씬 더 많았다.
예전엔 시집살이를 잘 하려면 입이 걸어야했다. 새댁이 이것 저것 가려먹다간 배곯기 일수였다.
보리밥을 먹지 못하는 집사람은 거의 굶다시피 했다고 한다. 몇 십년이 지난 뒤에 독백처럼 들려주던 집사람의 얘기였다.
집사람은 농사일은 전맥이었다. 어머니는 보리베려 뒷골 밭에 가는 내 뒤에 꼭 집사람을 딸려보냈다.
보리 한 골도 채 베지못한 집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기야! 우리 좀 슀다하자."
그러니 어쩌랴 나 하나보고 우리 집에 살려 온 집사람인데,
"그러지 뭐!" 라고 맞장구를 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1972년 12월, 다니던 직장인 마성면사무소를 그만 둔 나는 아내가 쓰러지던 그때 일자리를 따라 영주에 와있었다.
소식을 듣고 처갓집에 들렸더니 집사람은 첫돌이 지난 딸아이 선아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접을 와있었다.
엄마의 건강이 부실하니 아이에게 먹이던 모유를 뗄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젖을 얻어먹지 못한 첫돌박이 우리딸 선아는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전번에 봤을 땐 아장아장 걷던 딸아이였다.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 눈물이 뺨을타고 흘러내렸다. 가슴이 메워졌다.
'저것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이라 오늘은 딸아이가 집에 있으려니.
딸아이는 학원강사다. 모르긴 해도 아이들은 맵짜게 잘 가르칠 게다. 적당히를 모르는, 우리 경상도말로 이 아빠를 빼다꼽은 내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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