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들판의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
자취를 하는 집에서 좁다란 밭둑길을 따라 조금쯤 떨어진 집, 독가촌에 성능제라는 친구가 살고있었다.
능제는 열아홉살 동갑내기친구였다. 능제는 학생이 아니라 읍내 이발관에 다니는 이발사였다.
내가 자취를 하고 있던 집은 상주읍이 아닌 내서면 연원동에 있었다.
내서면 연원동은 상주읍 무양동 강 건너에 있던 마을이었다. 나즈막한 야산 아래, 냇가에,
언덕배기 둑밑에, 많게는 대여섯 집, 적게는 두세 집이 모여서 마을을 이룬 그런 동네였다.
어느날 저녁, 집에 놀러온 능제가 말했다.
"낼모레 일요일이 저 내 건너 산밑 동네 두둘마에 사는 친구, 영훈이 할배 환갑이란다. 놀러오라 하니 우리 한번 가보자!"
"잘됐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니 건우하고 셋이서 함께가면 되겠다."
잘됐다는 둣 내가 그렇게 응수했다. 건우는 함께 자취를 하던 나이 두살 적은 고향동네 친구였다.
초등학교를 아홉살에 입학한데다 중학졸업하고 또 일년을 묵었던 나는 열아홉 나이에 고1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주농잠고등학교를 다녔는지라 자취방을 학교 가근방에 구해야 했다. 그랬었는데 능제 어른과 안면이 있는 아버지께서 자취방을 덜렁 학교에서 1.5km쯤 떨어진 연원동에 구해놓고 말았다. 조용해서 공부하기 좋다시며.
덕분에 쌀이라도 떨어져 집에다녀올때는 기차역에서부터 쌀 한 말 걸머지고 1.5km 그 먼길을 끙끙대며 오느라 고생 꽤나했다.
일요일 저녁때였다.
능제와 건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친구는 휘파람을 불며 두둘마 환갑집을 찾아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또래로 보이는 떠꺼머리 두엇이 앉아 있었다. 우린 그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딴에 손님이랍시고 상이 들어왔다.
진수성찬이었다. 떡에, 전에, 별별 과일과 과자에 없는 것었다. 김치와 국 한 그릇뿐인 자취집 음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나랏님 상과 다를바 없었다.
열입곱, 열아홉 한창 먹새좋은 나이였다.우린 신바람나게 먹어댔다. 그런데 탈이나고 말았다. 주는대로 받아마신 그 노무 막걸리 때문에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횡설수설하며 술에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나를 능제가 업어서 자취방에 누이고 돌아갔다고했다. 열아홉,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한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신분인 학생이었다.
능제네 큰 누나는 우리 마을 팔복이 형님 부인이었다. 그래서 능제는 우리 동네에 이따금 놀러를 오곤 했다. 상주에서 문경 가은에 있는 우리동네까지는 백여 리가 조금 넘었다.
1971년 군에서 제대를 하던 해였다. 가을이었다. 당시만 해도 경운기가 아주 귀했다. 면소재지에 있는 단위농협에 다니던 동네 아우, 경우는 농협의 경운기를 끌고 이따금 퇴근을 하곤 했다. 그날도 경우는 경운기를 끌고 퇴근을 했다. 우리는 능제를 경운기에 함께 태우고 목적지도 없이 어디론가 마냥 달렸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농암장터였다. 농암장터는 우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져 있었다. 장터 어느 술집에 퍼질러 앉은 우리는 술을 원없이 마셔댔다. 경운기 운전사 경우는 술을 한 두잔만 마시는 듯했다.
우리는 술에 떡이 되다시피해서 마을로 돌아왔다. 나는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그런 나를 능제가 업어서 우리집 안방에 누이고 돌아갔다고 했다.
젊은 날 그렇게 술에 만취되어 혼절했을 때, 두번이나 능제의 신세를 졌다.
나이 예순이 넘어서면 누구나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능제를 떠올리며 어디에 살고 있는 가를 지인을 통해 수소문 해 보았다. 얼마 뒤 연락이 왔다. 외국으로 이민갔다는 능제의 소식이 전해졌다. 허탈했다.
그 넓은 등에 나를 업고 자취방에, 고향집 안방에 누이고 돌아가던 능제의 넓직한 등을 떠올리며 한 잔술로 그리움을 달래던 날도 있었다.
벌써 십여 년전의 일이다.
친구야. 등이 넓은 친구야! 어디에서 살아가던 건강하렴. 잘 살어렴.
목숨 다할 때까지 난 자네를 잊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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