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를 할때인 1968년, 그 당시엔 울산, 용잠마을에서 장생포를 가려면 거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5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까마득한 옛일이라 기억이 아삼아삼하다. 그때 그 거룻배의 사공이 처녀뱃사공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노젓는 법을 배우고 나오는 것 같았다. 어른이고 아이고, 노젓는 일에는 이골이 났으니 말이다.
장생포항은 장생포만안에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가근방 내해(內海)에 정박 중이던 올망졸망한 배들이 모두 장생포항으로 모여들었다.
그때만 해도 장생포항은 포경선의 기지였다. 고래를 잡아 귀항하는 배들은 입항시 정해진 신호가 있었다. 일테면 뱃고동을 "붕 붕 부웅!"세 번 울리며 들어오라든지 그런 약속 말이다.
잡아온 고래는 분해하여 크다란 솥에 삶았다. 말이 좋아 솥이지 조그만 동산을 팽이처럼 세워놓은 것 같았다. 솥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컸다.
고래를 삶는 날이면 새큼한 고래고기 냄새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고래가 얼마만큼 큰지를 고래를 실제로 보지못한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50여 년 전, 당시 장생포초등학교 교문위 아취형 장식품은 고래 갈비뼈였다. 밭둑에 박아놓은 말뚝도 나무가 아니고 부러진 고래갈비뼈였다. 고래는 그렇게 컸다.
경비정 울산호와 파도에 함께 탔던 유 병장님, 김 병장님, 최 상병님, 똑 같은 일등병이었던 김영수, 원우상, 문행복, 박종찬, 박기원, 이의운, 조후식 전우는 그 어느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가을밤, 젊은시절 청춘을 함께 했던 전우들을 기억해 본다. 이젠 몰라보게 늙어버렸을 그때의 전우들이 눈물겹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