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동산은 삼대 꽃동산이다. 원조꽃동산은 제1가흥교에서 조금 떨어진 한갓진 곳에 있었다. 원조꽃동산은 남부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만들었다. 동그랗게 돌 쌓아올리고 흙 덮고 빨간 봉숭아와 백일홍, 노란 채송화와 키다리꽃 해바라기 두어 포기를 심어놓고 동산 가운데 '꽃동산'이란 팻말을 세웠다. 지금처럼 현란한 꽃동산이 아닌 순박하기만했던 원조꽃동산이었다. 나는 저 꽃동산을 모티브로 해서 스토리텔링 '꽃동산1.2편'을 집필했다.
간판업체인 저 자리가 70년대 중후반기엔 '현 의상실'이라는 양장점이 있었던 곳이다. 저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그 당시 우리 집이 월세를 살았던 시범주택이 나온다. 우리 집은 시범주택에서 근 삼년을 살다가 꽃동산 로터리다방 뒷동네로 이사했다. 집사람이 시장갔다 돌아올 때 저 길로 가지 않으면 등에 업힌 막둥이 곰돌이가 집사람 머리를 잡아당겼다고 했다. 그러던 막둥이가 올해 마흔 다섯이다. 세월은 공으로 흐리지 않기 때문이다.
삼각지 마을 초입이다. 중앙선 복선 공사가 한창이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저 철둑길 둔덕엔 봄이면 하얀 찔레꽃이 피어나곤 했었다. 개발을 위해 자연은 망가진다. 자연과 함께하는 친환경적 개발은 왜 아니 될까?
나처럼 차가 없는 시민들을 실어나르는 시민의 발 노릇을 하는 영주여객이다. 행선지를 가고 오는 버스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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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남간재 아리랑'의 주인공인 별아줌마 남간댁과 광시아제는 저 실내포차 남간재에서 만나서 안면을 텄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시인도 시를 보고 못 본 채 할 수는 없는 일.
길게 이어진 초록의 미학!
드디어 다가왔다. 남간재의 모습이.
시절은 어수선해도 꽃은 피고 진다.
예전에 국영기업체 징수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저 대성임업 사무실엔 아주 예쁜 아가씨가 경리로 있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그 아가씨 모습이 아삼아삼하다.
여느날처럼 엊어제 오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 남간재를 다녀오려고 방향을 동쪽으로 잡았다. 벨리나 웨딩홀을 지나 굴다리를 건너서 가려다 맘을 바꿔먹고 꽃동산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1975년 우리 집이 영주에 첨 아사왔을 당시만해도 꽃동산은 저곳에 있지 않았다. 부근에 사는 주민들이 흔히 가흥다리라고 부르는 제1가흥교 아래 한적한 곳에 꽃동산은 나지막이 앉아있었다. 난 그때의 꽃동산을 '원조 꽃동산'이라고 부른다.
동으로 동으로 달려간 자전거는 어느결에 삼각지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연녹지마을로 묶여서 개발이 제한된 마을이었지만 언제부턴가 풀려나서 요즘은 '영주시 노인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들어섰다. 한때는 사고자가 많이 살아서 '별들의 고향'이라는 달갑잖은 별칭으로 불리던 마을이었다.
자전거는 삼각지마을을 휘돌아서 삼호아파트를 거쳐 조경자 시인이 다니는 시민교회를 지나가고 있었다. 시민교회는 영주에 있는 그 많고 많은 개신교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한다.
자전거는 아무런 군말 않고 스리 슬슬 잘 굴러가고 있었다. 올해로 꼭 12년째를 나의 발노릇을 해온 자전거이다. 수년 전 신발이 해져 발이 아파 못 걷겠다고 푸념을 하기에 새신발을 사서 신겼더니 찍소리 않고 앞만보고 달려온 고맙기만 한 내 자전거였다.
저쯤에 경북의 명문중학, 영주중학교가 보인다. 문단의 선배 문명숙 시인은 저 영주중학에서의 근무를 끝으로 교단에서 명퇴했다. 한참은 더 근무해도 될 나이에 아쉬웠다.
남간재 초입에 서있는 수령 오백여 년이 되었다는 동수목 느티나무가 눈앞에 다가왔다.
예로부터 그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고 넘어왔을 남간재하늘 위에 하얀구름 몇 조각이 머물러있다. 저 구름은 얼마 뒤엔 또 다른 곳으로 자리이동을 하려니. 남간재는 나의 단편 '남간재 아리랑'이 태동한 곳이다.
이쯤에서 시내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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