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날의 수채화/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9. 12. 26. 14:58

 

 

 

 

 

 

  앞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데 저쯤에 여섯 살 바기 채원이가 어를들 꽁무니를 쫓아 졸랑졸랑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요 녀석이 가던 길을 멈추더니 경비실 문을 열어보고 닫지도 않은 채 발길을 돌린다. '어라, 조 녀석 봐라. 문도 안 닫고 달아난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채원이를 불러 세우고, "왜 문도 닫지 않고 그냥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요 녀석이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생그레 웃으며, "아저씨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세요!" 라고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경비실에도, 주머니에도 사탕이 없었으니까. 고 예쁜 입에 사탕 한 개 물렸으면 더 예뻐 보일 텐데 퍽이나 아쉬웠다. '그래, 조 이뻔 녀석들 입에 물리게 초소에 사탕 한 봉 준비해두자.' 채원이는 토닥토닥 뛰어갔다. 저 만큼 멀어져간 어른들을 따라잡으려고 토닥토닥 뛰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는데도 채원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단독주택에 살고계시는 할머니 심심하다고 할머니 댁에 갔을 것이다. 할머니 곁에서 재롱피워가며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 들으며 할머니랑 오손도손 살고 있을 것이다.

채원이도 날 생각하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럴 것이다. 연분홍빛 풍선만한 조그만 머릿속에 저를 보고 예쁘다며 빙그레 웃어주는 경비할아버지의 늙수그레한 얼굴을 담아두고 있을 것이다.

 

  기범이는 동네에서 알아주던 골목대장이었다. 한창 골목길을 휘저어가며 개구쟁이 짓거릴 할 적엔 동네에서 그 누구도 못 말리는 이름 꽤나 난 개구쟁이였다. 전성기 때엔 또래패거리들과 함께 윗동네인 103동까지 원정까지 갔던 아랫동네 윗동네에서는 이름이 뜨르르했던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1초소와 2초소에 근무하는 경비원들에겐 '요주의 말썽꾼'으로 수첩에 이름이 올려 진 불명예를 안고 있는 그런 개구쟁이였다.

윗동네에 원정을 올라간 기범이 네 패거리들은 동네를 너무 들쑤셔놓아 그 동네 경비아저씨애게 쫓겨나고 말았다. 마치 말썽꾸러기 길냥이 쫓아버리 듯이 그 동네 경비아저씨는 인정사정 볼것없이 기범이 네 패거리들을 쫓아버렸다.

  그러던 기범이가 어느새 고1이 되었다.

  듬직한 고1이 되었다.

  세월이 공(空)으로 흐르지만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 따라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린 기범이 짝꿍들도 이젠 기범이처럼 듬직한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아파트 마당을 고라니마냥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승하는 나이팅게일의 후예가 되겠다며 김천간호대학에 진학을 했다. 승하는 정이 많아서였을까 눈물이 많은, 맘이 여린 아이였다.

  그런 승하가 간호사 일을 잘 해낼지 걱정스럽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승하는 분명,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며 간호사의 사명을 충실히 해내는 훌륭한 간호사가 될 것이다.

  2012년 가을 금요일 저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승하를 태운 택시는 1초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나를 승하가 보았다고 했다. 승하는 짐을 내려놓기 바쁘게 나를 만나려고 빵과 우유를 준비해서 경비실을 들렸다고 했다. 승하는 그해 스물한 살 대학2학년이었다.

 

  하얀 가운입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는 승하의 예쁜 모습을 떠올려본다. 학교를 졸업한 승하가 어엿한 간호사 되어 환우의 엉덩이에 주사바늘 찌르며, "아파도 쬐금 참아요!" 라며 환자를 다독이는 모습을 그려본다. 초등5년 때, "아저씨 저 부반장 됐어요." 자랑하며 온 마당을 뛰어다니던 승하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한 번 지어본다.

 

  쪽빛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곱디고운 며느리가 걸음걸이가 영 어눌한 시어른을 부축하여 차에 태운다. 어디 병원에라도 모셔 가려나보다.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듯하고, 며느리도 지천명엔 접어든 듯했다. 며느리가 시어른을 부축하여 차에 태우는 모습이 더없이 고와 보인다. 잘 그려진 한 폭의 가을수채화처럼 아름다워보인다.

  요즘 사람들은 내 아들, 네 며느리 할 것 없이 어른을 잘 모시려들지 안는다. 세태가 그러하다. 그것은 도도하게 흐르는 탁류다. 그저 지켜볼 도리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가정은 가족으로 구성된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다.

  가정이 건전해야 사회가 맑고 밝고 건겅해진다. 가정은 끈끈하게 진한 혈연과 가족애로 맺어진다. 예전에는 부모가 연로하면 그 부양은 자식의 몫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이었고 보편적 가치였다. 그러나 세상이 산업화, 핵가족화 되면서부터 그러한 규범이, 보편적 가치가 무노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식의 당연한 의무가 시설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머잖아 국가로 넘어갈 것이다.

  차는 부르릉! 가버렸다. 시어른과 며느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보던 가을 햇살이 붓을 들더니 파란하늘위에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걸음걸이 어눌한 할아버지도/곱디고운 며느리도/연분홍빛 미소로/빨갛게 익어가는 산수유를 그린다// "아차!"하고 잊어버린 듯/ 하얀 물감 듬뿍 적셔/ 하늘 할아버지 너털웃음 화폭에 채워넣고/ 화가는 만족한 듯 싱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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