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물따라

아침 산책길에서/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9. 7. 25. 10:00

 

 

 

 

 

 

 

 

 

 

 

 

 

 

 

 

 

 

 

 

이른 아침에 소나기 한줄금 쏟아졌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날씨가 죽끓듯 변덕을 부려댄다.

글 몆줄 쓰려고 컴앞에 앉았는데 피로가 엄습해온다.

몸이 약해서 그럴 것이다.

그래, 쉬었다오자.


천정을 올려다보며 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곡을 듣는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1970년에 대한민국 가수 김추자가 불러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님은 먼 곳에'이다.

고고풍의 느린 노래다.

신중현이 작사 작곡했다.


몸도 맘도 쉴만큼 쉬었으니

컴앞에 다시 앉는다.

주절대는 비가  발목을 묶어버렸다.

어제 이맘때는 여느 날처럼 영주교회로비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커피한잔을 뽑아와 교회 앞 화단 콘크리트울타리에 엉덩이 깔고 앉아,

훌쩍훌쩍 커피를 마셔댔다.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는 커피는 달착지근 했다.

아침엔 애비가 꼬맹이가 상을 탔다고 카톡으로 알려왔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꼬맹이가 상을 타다'니 지나가는 소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우리 집엔 손자는 없고 손녀딸만 두 놈 있다.

큰손녀딸은 열세살 초등학교6학년이고, 막둥이는 아홉살 2학년이다.

큰손녀딸 신우는 태어날 때부터 엄청 예뻤다.

첫돌이 지난 손녀딸은 그림같이 예뻤다. 안고 밖에라도 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예쁘다고 입을 다셨다.

손녀딸이 영주에 내려오면 걸리기가 아까워서 아이가 네살 때까지 맨날맨날 업고 다녔다.

그런 손녀딸이 닷섯살에 접으들자 똥깨가 무거워져 업고 다닐 수가 없었다. '똥깨'는 몸무게를 뜻하는 경상도 문경지방사투리다.

막둥인 그러질 못했다.

갓난아기는 웬만하면 예쁜 데 우리 집 막둥이는 그러질 못했다.

막둥이가,"응애!"하고 첫울음을 울며 태어나던 날, 애비가 카톡에 사진을 올려놨다.

아이의 몰골을 보니 기가 막혔다.

머리카락 한올 없는 민머리에다가 눈은 쭉 찢어졌고, 코는 주먹코였지만 조그만 입은 예뻤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는 곰배 같았다. 곰배는 고무래의 경상도사투리다. 고무래를 경상도에서는 '밀개'라고도 부른다.

집사람은, "이걸 어째!"라며 한숨을 들이쉬었다.

"젖 잘먹고 똥잘 싸면 금방 이뻐질 걸." 그렇게 말을 하며 집사람을 달랬다.

막둥이는 할애비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젖 잘먹고 똥잘 싸며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첫돌이 지나고 세살이 되고 또 네살에 접어든 막둥이는 야금야금 예뻐져갔다.

막둥이는 할아버지 전화를 받다말고 저 만큼 달아나곤 했다. 할아버지 전화보다는 노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제멋대로였던 꼬맹이가 여섯살에 접어들자 조금씩 조금씩 철이들어갔다.

언젠부턴가 영주에 내려왔다 올라갈 때면,

"할아버지,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하고 인사도 곧잘 한다.

우리 집 막둥이 손녀딸 시우가 받은 상은 학교밖에서 주는 상이었다.

'제11회 굿네이버스희망편지쓰기대회'에서 받은 장려상이었다.

지 언니 신우는 제작년엔가 희망편지쓰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었다.

지 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꼬맹이 막둥이손녀딸, 떼쟁이가 상을 받았다니 그게 어딘가.

우리 집 두 손녀딸, 신우와 시우는 늙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고 삶의 버팀목이다.


길과 인접한 영주2동사무소 나지막한 화단에는 메꽃과 봉숭아가 피어있었다.

연분홍빛 메꽃은 단아했고 빨간 봉숭아는 곱기만 했다.

어릴 적, 나보다 일곱살 더 먹은 둘째 누야는 봉숭아가 곱게 피는 여름날이면 빨간 봉숭아꽃을 따다가 돌팍에 찧어서 열손가락 손톱에 싸매곤했다. 손톱엔 자고나면 새빨간 봉숭아꽃물이 곱게 들었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숭아 반 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 그리시며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을 생각하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 연붉은 그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듯이 힘줄만 서노라.


중학교 다닐 때 배웠던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시조, '봉숭아'를 입속으로 읊어대며 자전거의 핸들을 북쪽으로 돌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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