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혼자된 외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오남매를 키웠다. 우리 집에 들를 때마다 고된 일로 부르트고 주름진 발을 꼭꼭 누르며 말했다. "오래 걸으면 발이 쑤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내 손에 이만 원을 쥐여 주었다. "우리 손녀 필요한 거 사." 그날 외할아버지 발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는 신발가게에 갔다. "외할아버지 드릴 멋진 산발 주세요." 주인아주머니는 내게 몇 켤레를 추천했다. 그중 윤기 흐르는 갈색 구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두 신은 할아버지를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그런데 집에 오자 엄마 반응이 기대와 달랐다. "이걸 이만 원이나 주고 샀다고?" "응. 내 운동화는 칠천 원이잖아. 그러니까 이만 원짜리 구두는 얼마나 좋겠어?" 엄마는 품질이 좋지 않은 데다 바가지까지 썼다고 했다. 한숨 푹 쉬는 엄마를 보니 속상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구두를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남자 구두는 내가 잘 알지. 이거 진짜 좋은 거여."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날부터 외할아버지는 내가 사 준 구두만 신고 다녔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가 실망할까 봐 딱딱한 구두를 신고 다니며 반찬고를 잔뜩 붙이고 통증을 꾹 참았다는 것을. 지금도 남자 구두만 보면 외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위글은 한화생명에서 발행하는 '좋은생각' 2016년 8월호에서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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