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픽션

종달새/김범선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8. 4. 9. 17:36

 트랙터의 엔진 소음 때문에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정태는 알아듣지 못했다. 두 손으로 엑스(x)자를 표시하자 정태는 트랙터의 엔진을 껐다.

  "밭둑에 매실나무 있어. 너무 가까이 가지마!"

  그제야 정태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트랙터가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시루떡같이 까만 흙이 턱 자빠지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향긋한 흙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난봄에 번개시장에서 매실나무 한 그루를 사 밭둑가에 심었다. 그런데 겨우 사름(뿌리 내린 상태)이 되어 잎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여름철에 낫으로 풀을 베다 그만 나무 중간을 삭둑 잘라 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들어 나무를 붙이고 비닐로 묶어 놓았다.

  뽕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자두에는 좁쌀같이 작은 꽃눈이 맺히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밭을 갈다가 무심코 둑을 살펴보니 작년에 비닐로 묶어 놓은 매실나무가 보였다.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기나긴 겨울 동안 나무는 얼어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비닐을 풀어 보니 잘린 나무는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매끈하게 잘 붙었다. 그뿐 아니라 나뭇가지에는 작은 움이 싹을 틔웠다. 그래서 트랙터로 밭을 가는 정태에게 나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작년에는 고추와 참깨, 콩과 들깨를 심어 그런대로 재미를 보았다. 트랙터로 먼저 밭을 갈아엎은 종호 부부가 선호미(서서 사용하는 호미)로 이랑을 짓는 중이었다.

  "뭐야! 이랑이 비뚤어졌잖아. 바로 좀 타."

  종호가 말하자 부인이 "당신 거나 잘 하셔!" 하고 언성을 높이며 말대꾸했다. 바로 옆은 친구 종호네 밭이다.

 종호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다 재작년에 고향으로 귀농했다. 부부는 평소에는 사이가 좋은데 밭에서 일만 하면 싸웠다.

  종호는 성격이 꼼꼼하고 세심해 밭일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 밭이랑을 짓는 일도 줄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골을 탔다. 고추 모종을 심을 때도 40센치미터 간격으로 물을 줘 가며 심었다. 그런데 부인은 밭이랑을 대충 만들고 고추 모종도 대충대충 심어 놓았다.

  "여보, 당신은 그만둬. 이게 모종 심은 거야?"

  종호가 나무라자 부인이 "어유, 또 잔소리! 남자가 쫀쫀하기는 대충 심으면 되지." 라고 되받아치며 빈정거렸다.

  부부는 고추 모종을 심다가 밭 복판에서 대판 싸웠다. 상대방이 하는 일이 못마땅해 서로 간섭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다퉜다. 친구 부부의 고추밭 싸움은 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작년에 두 사람이 밭이랑을 만들며 하도 다투기에, 이랑이 모두 열 개니 다섯 개씩 공평하게 나눠 농사지으며, 다툴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부부는 합의하에 다섯 이랑씩 나눠서 고추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서로 농사일에 절대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종호는 밥이랑에 줄자를 대고 금을 그어 가며 멋지게 골을 탔다. 그러고는 비닐을 덮어씌우고 물을 줘 가며 고추 모종을 보기 좋게 심었다. 반면 부인은 눈짐작으로 밭이랑을 만들어 골을 짓고 고추도 듬성듬성 심었다.

  그해 가을, 친구는 고추 스물두 근을, 부인은 스물세 근을 수확했다. 장맛비가 많이 내린 탓에 고추는 탄저병에 걸렸다. 약을 쳤는데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 종호처럼 꼼꼼하게 농사지으나 부인처럼 대충 농사지으나 수확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부인이 수확한 고추가 한 근 더 많았다.

  종호는 매사에 꼼꼼한 반면, 동갑내기 부인은 대범하고 털털하며 마을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부부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티격태격하던 종호 부부가 어느새 다정하게 비닐을 같이 잡고 밭이랑에 덮어씌웠다.

  어느덧 봄은 하얀 구름 너울을 쓰고 파릇한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갑자기 종달새 한 마리가 날아와 뽕나무 가지에 앉더니 종호 부부를 내려다보며 지저댔다.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소설가 김범선 님은 개인적으로는 제 스승이십니다. 저는 2012년 3월,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지금껏 소설, 수필, 미니 픽션같은 산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위글은 한화생명에서 발행하는 '좋은생각' 2012. 05호에 게재된 김범선 소설가의 미니 픽션입니다. 선생님 몰래 제블로그에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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