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하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아기를 들쳐업은 엄마가 아기에게 속삭인다. "비가 오네요. 빨리 갑시다!" 엄마는 껑충껑충 뛰기 시작한다.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구수한 흙 내음이 확 풍겨온다.
엄마와 아기는 지금쯤 집에 다 갔을까, 비를 피해 어디서 쉬고 있을까?
한 여름 차창을 죄다 열어놓았지만 버스 안은 한증막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곁에는 중학교2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있다. 손자인 모양이다. 녀석이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설렁설렁 부채질을 해준다. 할머니는 대견한 듯 빙그레 웃으며 손자를 바라보신다. 차창 밖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종알종알, 재잘재잘, 헤헤헤, 제비새끼들이 모여 논다. 동네 꼬맹이들이 신바람 나게 놀고 있다.고무줄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정신없이 놀고 있다.
언니들 틈에 끼어 같이 놀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머리가 긴 예쁘장한 꼬마아가씨!
저런, 동생이 쉬를 하려는 모양이다. 동생의 바지를 내리고 쉬를 시킨다. 한손으론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연신 치켜 올리며 동생이 쉬를 하도록 도와 준다. 누나 노릇 제대로 하는 대견스런 꼬맹이 누나다.
초가을 토요일 오후, 두 시가 가까워 온다.
출장나온 김에 잔무를 남기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었더니 시간이 꽤 지나쳐버린 모양이다. 귀청해서 퇴근을 하려고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는다.
저만큼 앞에 사회과에 근무하는 민정 씨가 휘적휘적 걸어온다. 철둑너머 새마을 동네에 있는 친정집에 가려는 모양, 너풀너풀 걸어온다. 헐렁한 평상복차림에 아들, 현수를 들쳐업고 포대기를 질끈 동여맨 모양새가 아주 제격이다. 한 손엔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들고 너풀너풀 걸어오니는 게 영락없는 아줌마다.
결혼과 육아가 그 여우같은 민정 씨를 저렇게 바꿔놓은 모양이다. 물론 민정 씨는 월요일이면 화장하고 맵시내어 통상적인 여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지만 오늘은 아줌마다.
"어머, 김 주사님, 아직 퇴근 못하셨네요!"
"그래, 민정 씨! 엄마한테 가는 모양이지. 잘 쉬었다 와."
초가을 오후. 따사한 가을 햇살을 이고 주적주적 걸어가는 민정 씨의 뒷모습은 분명, 평소에 늘 보아왔던 민정 씨의 모습이 아니다. 풋 냄새가 나는 어설픈 엄마, 초년생 아줌마의 모습이다.
예쁜 여유로 둔갑한 화려한 모습보다 초년생 주부의 냄새를 솔솔 풍기며 걸어가는 아기엄마 민정 씨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왜서일까? 엄마가 여인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출근 길, 비가 내린다. 보슬비가 소리없이 내린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못 마땅한지 시무룩한 얼굴로 웬 고등학생이 학교에 간다. 1학년쯤 되어보인다.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가 멀어져가는 아들을 바라다보며 외친다. 손나발을 만들어 입에대 대고 외친다.
"아들, 아들 농땡이 치지 말고 열심히 해요!' 아들을 부르는 아줌마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보슬비에 촉촉히 젖어든다.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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