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집에 가려고 목고개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저만큼 떨어져 있는 동쪽, 나지막한 산 아래 '방구머리' 가 보였다. 친구형님, 이재명 어르신이 사시는 동네를 예로부터 방구머리라고 불렀다. 방구머리는 마을입구, 오른 쪽 산모퉁이에 집채만 한 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었다. 큰 바위 머리맡에 있는 동네라 해서 동네 이름이 '방구머리' 라고 불렸을 것이다. 방구머리는 아랫동네인 큰 마을로부터 북쪽으로 2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대여섯 집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그런 작은 마을이었다.
목고개 너머 동쪽 서쪽에 있는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은 가은장, 농암장을 보러가거나 고개 너머 들에 일하러 오갈 때는 반드시 목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고향이 목고개 안동네, 새터였던지라 고향을 떠나오던 스물아홉까지 참으로 뻔질나게 목고개를 넘어 다녔다. 목고개 너머 오리쯤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닐 적엔 6년동안 동무들과 어울려 재잘재잘, 타박타박, 목고개를 넘어 다녔다. 읍내 중학을 다닐 때엔 자전거를 타고 넘어 다녔고, 고등학생이었을 적엔 학교가 상주에 있었던지라 초저녁이나 캄캄한 한밤에 목고개를 넘어서 집에 왔었다.
꿈같던 시절 열여덟! 방구머리 재경이와 방구머리 아랫동네 성너메 사는 상규, 새터동네 나, 이렇게 세 친구는 가근방에서 이름난 악동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놀 때였다.
여름밤! 밤하늘에서는 별빛이 겁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구구구구 계집죽고, 구구구구 자식죽고' 산비둘기는 피를 토해가며 그렇게 울어대었다. 계집죽고, 자식죽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앞마당에 매어놓은 황소까지 죽어버리자 화병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는 전설속의 홀아비! 그렇게 죽어버린 홀아비 넋이 환생하여 산비둘기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들 세 악동은 고갯마루 신작로 한복판에 가지런히 누워서 혹시 시비 걸만한 놈 지나가지 않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그렇게 누워서 어수룩한 놈이 고갯마루에 올라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다!" 상규가 나지막히 속닥였다. 고개아래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자전거를 끌고 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쯤 될 성싶었다. 우리는 옴짝달싹하지 않고 누워서 그네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삐걱" 길 가녘에 자전거를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잡고 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자들이 코 앞에 다가오면 벌떡 일어나 시비를 걸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랬는데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렸다.
"이 노무 자식들 퍼뜩 몬 인나나!"
그자들은 그렇게 고함을 질러대며 우리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집어찼다. 엉덩이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씨팔, 언놈이야."
그렇게 욕지거리를 해대며 우리는 벌떡 일어섰다.
순간 우리들 눈앞에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엉덩이를 걷어 찬 그자들은 우범지역 순찰을 나온 읍내지서 주임과 순경이었다. 뛰어봐야 벼룩이었다. 아니, 뛸 수도 없었다. 우리는 '주먹 쥐고 엎드려 뻗쳐' 를 팔이 뻐근하게 해야 했고 그리고 나서도 일장훈시를 듣고 난 뒤에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못됐기로 소문난 '대추영감' 이라고 별명이 붙은 지서주임에게 걸렸는데 그 정도로 풀려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이 더러버서" 우리는 그렇게 투덜대며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
목고개는 가마타고 시집가던 색시가 가마가 넘어져 고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이 깃들어있는 고개다. 지금의 목고개는 신작로를 내면서 산허리를 자르고 고개를 낮추어 원래 높이보다는 십여 미터쯤 낮아졌을 것이다. 애초의 목고개는 사람 두 셋이서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좁다란 고개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부임하자 첫 사업으로 조선의 도로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이른바 신작로(新作路)를 낸 것이었다. 데라우치는 신작로를 내면서 조선의 도로는 포차 한 대가 지나 다닐 수 있는 넓이면 된다고 했단다. 오솔길이었던 목고개도 그 무렵에 넓혀졌을 것이다.
숙종36년 경인년 진달래 화창하게 핀 어느 봄날, 목고개 마루를 웬 신행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신랑이 타고 가는 조그만 조랑말 뒤를 신부의 가마가 봄바람처럼 사뿐사뿐 따라 가고 있었다. 혼수를 짊어진 짐꾼 한 사람만이 너펄너펄 가마 뒤를 쫒아가고 있었다. 조촐하지만 품격이 느꺼지는 신혼행렬이었다. 조랑말을 타고 가는 신랑은 헌헌장부였다. 가마 안의 색시도 현숙한 규수였을 것이다. 조촐하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신랑신부 양가 모두 가세가 기운 양반가인 듯 했다. 해동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산골짝은 잔설을 품고 있었다.
신랑은 고갯마루에서 십여 리가 좀 못 미치는 작천동네에 사는 김 선비댁 아들 승규도령이었다.아니 장가를 들었으니 이제 김서방이었다. 김서방은 본관이 순천(順天)이었다. 신부는 고개 너머 오리쯤에 있는 강변마을 압솟골 평산(平山)신씨 가문의 숙영낭자였다.
강 건너 압솟골 마을은 평산 신씨 집성촌이었고 강 이쪽 마을 소양은 순천 김씨 집성촌이었다. 목고개 너머 동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작천마을과 아차마을도 순천 김씨 집성촌이었다. 압솟골 마을 평산 신씨는 무오사화 때 거창현감을 지낸 신숙빈의 후손이었다. 안동 풍산에서 산수 수려한 곳 소양(瀟陽)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온 인백당(忍百堂) 순천 김씨 김낙춘(金樂春)은 신숙빈의 손서(孫壻)였다.
옛날, 강 건너 압솟골 평산 신씨가의 규수가 소양동네 순천 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시집온 지 몇 해 후 어느 여름 날, 친정 조모님이 노환으로 운명하셨다는 부음이 날아왔다. 그 다음날 시조부님이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시조부님보다 친정조모님이 하루 일찍 운명하신 셈이었다.
소양동네 뒷산에 '기골'이라고 하는 아주 넓은 분지가 있었다. 기골에는 순천 김씨와 평산 신씨 양 문중 선조들의 산소가 있었다. 나의 모교 문양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운동장을 채 닦지 못해 1회 졸업생은 가을운동회를 기골에서 하였다고 했다.
고향마을에 병호라는 친구가 있었다. 정해(丁亥)생 돼지띠 동갑내기 친구였다.
어릴 적 여름날이었다. 전 날, 억수같이 쏟아진 폭우로 학교 앞 강물이 엄청 불어났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병호가 돌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져 강물에 빠졌다. 병호는 꼼짝없이 강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친구를 기골 입구에서 옻을 내던 웬 어른이 보았고, 잽싸게 산을 내려온 그 어른이 병호를 건졌다. 그런데 친구, 병호를 건진 그 어른 말이 아주 걸작이었다. '꼬맹이기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면서도 콧구멍에 물들어 갈까봐 오른 손으로 콧구멍을 틀어막고 있드라.' '코에 물 많이 들어가면 죽는다!' 는 말이 참으로 겁이 났던 시절의 동화 같았던 이야기였다.
사실 여부야 알 수도 없고 절친이었던 그 동무는 재작년, 추석이 지난 며칠 뒤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새댁의 친정에서는 발인(發靷) 하루 전 날 미리 잡아놓은 기골의 명당에다 산적을 했다. 산적이란 발인 전날 묏자리를 미리 파놓는 일을 이름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문경지방사투리이다.
예부터 딸년들은 마구 도둑이라고 했다. 그날 밤 평산 신씨 가문에서 시집와 순천 김씨 가문의 종부가 된 새댁은 밤을 새워가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 친정할머니가 누울 산소에다 부어댔다. 다음 날 집을 나선 상여가 장지에 도착해 보니 관을 모실 자리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명당이라고 정해놓은 묏자리가 명당은 커녕 패가망신할 흉지(凶地)였다. 부랴부랴 지관에게 다른 장소에 산소자리를 물색하라고 이른 뒤 묏자리를 다시 팠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해서 새댁의 친가에서는 늦은 저녁에서야 무사히 치장(治葬)의 예(禮)를 마칠 수 있었다.
도둑딸년이라고 누명을 쓴 덕분에 새댁은 시조부님을 명당에 모실 수 있었다. 며느리는 친가에서는 도둑년 시댁에서는 그렇게 효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유교윤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여인들에게는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었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딸년들은 마캉 도둑년이지."
"왜, 자기는 딸년 아인가?"
"순천 김씨 종부 좀 보라고. 그게 도둑년 아인가베."
"한 문중에 시집와서 시댁귀신 될라카만 별도리 없는 기 아이가?"
가마는 고갯마루를 내려가고 있었다. 돌을 밟을 때도 박힌 돌인지 들떠 있는 돌인지를 감각으로 알아내며 조심스럽게 걷은 것이 가마꾼이었다. 가마행렬이 고갯마루 첫 구비를 돌아갈 즈음이었다. 산 중턱에서 우르르 꽝 하고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바위덩이 세 개가 우르르 굴러 내려왔다. 해동이 몰고 온 낙석이었다. 고갯마루에서 저 만큼 올려다 보이는 거대한 암반에서 떨어져 내린 낙석이었다. 가속도가 붙은 바위덩이는 미쳐 피할 겨를도 없는 가마행렬을 그대로 덮치고 말았다. 가마 뒤를 따라가던 짐꾼 조서방만이 간신히 화를 면했다. 가마 안의 색시 숙영낭자는 목이 부러졌고 , 차서방과 지서방, 두 가마꾼은 얼굴과 가슴이 어깨진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새신랑과 견마를 잡고 가던 천서방은 말과 함께 고개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한 밤중이면 목고개 마루에 웬 가마행렬이 지나가곤 했다. 그러니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사람들은 무서워서 밤에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었다. 가마행렬은 불귀의 객이 된 숙영낭자와 새신랑 일행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그네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이 사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입들을 모았다.
신랑신부 양가와 인근 동네 어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회의 끝에 고갯마루에 위령각(慰靈閣)을 세우고 날을 받아 위령제를 지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고갯마루에 위령각이 세워졌다. 위령각이 준공되던 사월보름날, 길일(吉日)이라는 그날 위령제를 지냈다.
목고개 가근방에서 가장 연장자이고 덕망과 학식이 높아 뭇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소양마을 솟골어르신이 제사장이 되어 분향재배하고 첫잔을 올렸다. 아차마을 한실양반이 그 청아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었다.
"維 歲次 庚寅 四月 보름午時 祭官 김한림과 여러 참례객은 목고개에서 비명횡사한 망자님들께 정성껏 장만한 제물을 바치오니 노여워 마시고 흠양하소서. 극락왕생하옵소서."
한문과 우리말이 혼용된 참으로 기이한 축문이었지만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땅따당따다당 따다당 땅 땅,
지잉!
둥두둥두 두두두 둥
꽹과리 소리가 시끄럽게 울어댔고 가슴 넓은 징이 지잉하고 울며 고개 너머 멀리멀리 바람등에 실려갔다. 북소리는 둥두둥두 거리며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날아갔다.
위령제를 지내고 뒤풀이로 성너메 농악패들이 신명나게 한판 놀아났다. 열두자 상모가 현란한 춤을 췄다.
관산들과 장들, 새들과 연갯들에 논마지기라도 부치는 여러 동네 집들로부터 추렴한 쌀로 밥을 짓고 술을 걸렀다. 시루떡도 대여섯 시루 쪘다. 구름 같이 모여든 그 많은 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국에 밥을 말아먹고 막걸리 잔을 기우리고 떡을 먹어대었다.
"함창어른!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새터동네 천수아범이 잔이 찰찰 넘치게 술을 채워 성머메 마을 함창어른께 드렸다.
"그래, 고맙네. 명학이 자네도 한 잔 하게나.
머리털과 수염이 온통 신선처럼 하얀 함창어른이 당신에게 돌아온 잔을 벌컥벌컥 비운 뒤 천수아범에게 건넸다. 위령제는 그렇게 축제로 이어졌다.
밤이 이슥했다. 사월보름달이 중천을 훨씬 지났을 무렵에야 위령제는 끝이 났다.
위령제를 지낸 이후부터 한 밤중에도 고갯마루에는 가마행렬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위령각은 낡아지면 보수를 했다. 근 200년을 고갯마루에 서 있던 위령각은 목고개에 신작로가 나면서 없어져 버렸다고 했다.
목고개에서 논틀을 지나 오른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야트막한 산이 있고 산엔 공동묘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공동묘지에서 푸른 불빛이 일렁거렸다. 사람들은 그 불이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그 도빼비불이 너무 무서워 어릴 적, 비 오는 날엔 목고개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른들 신부름이면 어쩔 수 없이 이를 앙다물고 다녀오긴 했지만.
목고개에 나타나는 도깨비는 절름발이라고 했다.
철종 10년(1859년) 기미년 봄, 어느 날 농암장에 장보러 갔던 성너메 마을 용궁어른이 거나하게 취해서 목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한 많은 이 세사아앙 야소칸안 니이임아아
한 오배액녀언 사자느은데에 웨엔 서엉화아요오
음치를 조금 면한 듯한 용궁어른이 희한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러가며 목고개 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듣기라도 했다면, '도깨비가 불러도 저보다는 낫겠다!' 라고 할 정도였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도깨비가 나타났다. 도깨비는 선계(仙界)도, 속계(俗界)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 살고 있는 이상야릇한 허상이다. 허상이지만 사람처럼 걸어 다녔다. 아니 걸어다녔다기보다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이, 영감! 고곳도 노래라고 불러 쌌나? 내가 한 가락 불러 볼께, 말귀 맨치로 질쭉하게 생겨먹은 그 귓구멍으로 잘 들어보더라고 잉!"
아리아리라앙 쓰리쓰리라앙
알라리가 나았네에에
알리라앙 고개고개로오 나알 넘겨주우소오
"영감탱이, 어떤가? 영감 대만 백분 잘 허지. 근데 영감, 농암장에 댕겨 오남. 그러만 막걸리 두어 되 걸쳤을 끼고, 심도 펄펄 날 끼고, 그라이 우리 씨름 한 판 붙어볼까? 내가 이기면 영감을 밤새도록 냇물로, 가시밭으로, 끌고 다닐 끼고, 택도 없는 말이겠지만 만에 하나 영감에게 지면 등때기에다 영감을 둘러업고 집에 모셔다주지."
분수도 모르고 '꼴값 떤다!' 고 했다. 사람 흉내라도 내볼 양인지 도깨비는 무명바지저고리에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주제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도깨비였다.
흔히 머리에 뿔나고 요술방망이라는 이상한 방망이를 거머쥐고 설쳐대는 괴물을 도깨비라고 알고 있다.
아니다. 조선사람과 함께 숨쉬며 조선반도에 살아왔던 전통도깨비는 그런 도깨비가 아니었다. 을사강제늑약 이후 조선반도를 집어 삼킨 일제(日帝)는우리의 전통문화까지도 저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황국화(皇國化) 해버렸다. 우리의 전통도깨비조차 저들의 도깨비로 바꿔치기 해버렸다.
반도의 전통도깨비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했으며 조선적인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었다. 딴에는 해학과 위트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할 줄도 알았다. 가끔은 시 건방을 떨어 대어서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기고 했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도깨비는 그렇게 반말을 해가며 다짜고짜 씨름 한 판 붙자고 용궁어른에게 대들었다. 속계보다는 월등한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자부한 도깨비가 '저런 인간쯤이야!' 하고 얕잡아 보았다.
참으로 어지간히 재수 없었던 도깨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주, 함창, 예천에까지 소문난 씨름꾼으로 이름 석자가 자자하게 알려진 성너메 용궁어른에게 씨름하자고 대들었으니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용궁어른의 들배지기에 도깨비는 "어이쿠!" 하고 나가떨어졌다. 거꾸러 쳐박히면서 운수 사납게 하나밖에 없는 다리의 정강이를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뽀족 바위에 부딪히고 말았다.
도깨비는 다리를 절룩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 빠지게 도망질을 쳤다.
"싱그워 빠진 놈!"
용궁어른은 허겁지겁 도망가는 도깨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껄껄껄 웃어 제쳤다.
목고개에 나타나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어왔다는 도깨비는 그렇게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했다.
고갯마루에 올라선 버스가 굼실대며 굽잇길을 내려간다. 가마가 굴러 떨어졌을 골짜기를 내려다본다. 함초롬히 예쁘기만 했을 새색시 숙영낭자와 헌헌장부였던 새신랑 김서방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참으로 재수 나빴던 절름발이 도깨비를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본다. 천민의 설움안고 한생을 들풀같이 살다갔을 두 가마꾼 지서방과 차서방, 견마꾼 천서방의 모습도 허공 속에 그려본다.
이 땅에 먼저 태어나서 먼저 가신 목고개를 끼고 살아가셨던 고운 임들이여! 부디 극랑왕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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