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낮에 정오순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 시인은 내일아침 10시20분쯤에 영주교회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 희영이랑 같이 나가겠다고 했다.
퇴직을 하고 먹고대학에 입학하고부터 아침9시가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곤 했다. 생활의 리듬은 그렇게 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아침엔 약속시간을 맞추기위해 헐레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얼굴에 크림도 바르고 광(光)을 내었다. 볼품없는 노인네 얼굴이 호사(豪奢)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굴치장하고 평소 즐겨입던 케주얼은 찾아보니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정장을 하고 대문을 나섰다.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꽃동산농협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 집에서 꽃동산농협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이내의 거리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보니 정오순 시인과 김희영 시인이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별일 없으셨죠."
둘이는 입이라도 맞춘 듯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오순씨와 희영씨도 잘들 있었지요. 오랜만에 만나니 참 반갑네요."
"예, 선생님! 희영이랑 함께, 선생님 모시고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보려구요. 선생님, 괜찮으시죠?"
정오순 시인이 활짝 웃으며 운(韻)을 뗐다. 정 시인은 전북 순창이 고향이라고 했다. 정 시인은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을 잘 아우러고 잡아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쇳조각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정 시인이다. 남도출신답게 남도창(南道唱)을 잘부른다. 창엔 그의 막힘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청춘가와 쑥대머리를 잘부른다. 물론 대중가요와 가곡도 가수 뺨치게 부른다.
판소리 쑥대머리의 대가는 임방울과 박동진이라고 한다. 두분 모두 국악계의 큰어른이셨다.
"그럼요. 할일 없이 방안을 나뒹구는 판에 불러준 것만도 고맙지요."
그랬다. 퇴직하고부터 마냥 게으러지기 시작했다. 아파트경비일을 하고부터 13여 년 동안 못 잔 새벽잠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아홉시나 열시까지 자곤했다. 그렇게 자고 일으나서 고양이 세수하고 빵 한조각으로 아침을 떼우고 컴앞에 앉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러한 형편인데 선배랍시고 불러주고 챙겨주니, 그 아니 고마우랴!
"어디로 갈까요? 선생님, 맘내키시는 곳으로 모실게요."
"그러만 내고향 문경 가은, 희양산(曦陽山) 아래에 있는 봉암사(鳳巖寺) 한 번 다녀옵시다. 스님들 수련도장이라 산문(山門)안으론 못 들어서겠지만 절 뒷산, 희양산만 바라보고 와도 다녀온 보람을 느낄테니까요."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늘은 희뿌였지만 차는 쌩쌩 잘도 달렸다. 시내를 벗어 난 차는 서쪽으로서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30여 년전 1986년 가을, 그해는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였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은 그때, 울긋불긋 피어난 코스모스꽃길이었다. 길 양쪽에 흐드르지게 피어난 코스모스는 바람이 불때마다 춤을 추곤했다. 안무(按舞)는 바람이 했다. 바람이 들고있는 지휘봉에 따라 코스모스의 춤은 부루스에서 탱고로, 탱고에서 부루스로, 바뀌곤했다. 코스모스가 추어대는 군무(群舞)는 참으로 현란했다.
"이길은 고향가는 길이었지요.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그해 가을, 이길은 비포장이었답니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그 아름다웠던 길, 코스모스꽃길을 버스는 달려가고 있었지요. 어릴적 고향집에서 아득히 먼곳에 작약산(芍藥山)은 있었답니다. 작약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점촌읍내도,함창읍내도, 멀리 상주읍내도 보인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의 그 말씀은 조금은 과장된 듯해요."
"이 길 달리다보면 옛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시겠네요. 선생니임!"
희영씨가 그렇게 거들고 나섰다.
희영씨는 멀리는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백일장'에서부터, 가까이론 영양의 '조지훈백일장'과 안동의 '이육사백일장'을 두루 섭렵한 가히 천재시인이다. 키도 휜칠하고 몸도 마음도 아주 곱고 예쁜, 팔등신미녀 시인이다. 부산이 고향이라고 했다.
"예, 맞아요.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날, 고향길에 나설때면 집사람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집사람은 차멀리를 심하게 하거던요. 집사람과 어디 먼곳이라고 다녀오면 그 이튿날은 끙끙 앓아대곤 했답니다. 아무 데나, 웩웩! 토하는 집사람 뒷치닥거리에 지쳐서요. 여고2학년땐가 딸아이가 지 엄마하고 고향길에 나섰지요. 집사람이 그 짓거리를 해댔다 아입니까. 다녀와서 딸아이가 하는 말이 이랬답니다. '아빠, 엄마땜에 챙피해서 혼났어요! 다시는 엄마랑 차 같이 안탈래요.' 그래도 지지고볶고 살아가던 추억속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네요. 힘들게 살아가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가족이 있었겠지요."
어느결에 차는 산양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문경땅이다. 산양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곧장 3km쯤 올라가면 고저넉한 산, 운달산(雲達山)아래 김용사(金龍寺)가 자리잡고 있다.
김용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58) 운달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엔 '운봉사'라고 했는데 그 뒤 '김용사'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길 372이 거리명 주소다.
2004년 12월말 공무원을 정년퇴직하고 그 이듬해 5월, 아파트경비원으로 취업을 했다. 아파트경비원에게는 최저임금을 적용시키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철야근무를 했었다.
나보다 나이 두살 적은 전우홍 친구는 그때까지도 현직에 있었다. 그 친구는 수도사업소 청경이었다. 나와 그 친구가 쉬는 날이 맞아떨어질 때면 그 친구는 나를 자기차에 태우고 온 사방을 쫓아다녔다.
우린 영양주실마을로, 농암종택(聾巖宗宅)을 들리려고 안동 도산을, 김용사를 찾아 멀리 문경 산북까지 다녀오기도했다. 김용사 산문(山門)앞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전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밑둥이 엄청 굵기에 재어보았더니 자그마치 다섯아름이나 되었다.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전나무는 그렇게 우람했다.
젊은 시절엔 법보다 주먹이 빨랐다는 그 친구였다. 일테면 그 친군 건달출신이었다. 내겐 가정을 잘 챙기는 모범적인 친구와, 젊을 적 주먹질을 한 건달친구도 더러 있었다. 나도 건달끼가 다분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 친군 고마운 친구였다. 어제 아침,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한이가. 나 우홍이네.독감은 다 나았는가."
"그래, 병원에 들려 주사맞고, 닷세분 약먹고 그럭저럭 나았다네."
"그럼 오늘 점심같이 하세. 11시40분쯤 우리 집 앞으로 나오게."
"알았네, 그리합세."
그 친구와 난 그렇게 만나 닭백숙으로 점심을 함께하며 옛이야기 나눠가며 "허허허허!" 웃어젖혔다. 사는 건, 산다는 건 다 그런거다. 너나 없이 노년의 삶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점촌시내를 벗어난 차는 불정역(佛井驛)을 지나가고 있었다. 불정역은 문경선의 지선(支線)인 가은선 종창역인 가은역과 함께 아름다운 역사(驛舍)로 인해 보존가치가 있다하여 철거되지 않고 보존된 역이다. 영강(穎江)의 둥글납작한 자연석을 쌓아올려 지은 역사(驛舍)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해서, 전국의 여행가들은 그들의 블로그에 곧잘 올려놓기도 하는 정겹고 아름다운 역이다.
봄이면 불정역 앞을 흘러가는 영강변엔 작달막한 진자줏빛깔의 철쭉꽃이 흐드르지게 피어나곤 했다.
영강 상류는 가은이나 마성 같은 탄광지역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라 물빛은 언제나 까맸다. 그래서였을까. 미술시간에 아이들이 도화지에 그려놓은 강이 새카맸다고한다. 어른이 그렸다해도 강물은 까맸을 것이다.
봄, 고향에 들릴적마다 강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작달막한 진자줏빛 철쭉을 바라보며 소백산 철쭉을 떠올리곤 했다.
소백산에 단 한 번이라도 들린 상춘객(賞春客)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소백산 철쭉은 연분홍빛치마저고리 곱게 떨쳐입은 아릿따운 새댁'이란 사실을.
"30여 년 전에 강 건너 저 산에 산불이 났어요. 산불은 온 산을 태우고 산줄기 따라 한바퀴 빙돌아서 저 불정역 뒷산까지도 다 태워버렸지요. 대형산불이 일으나면 불길이 "휙휙!" 날아다니거던요."
"맞아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산불이 크게 나면 불길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건너 뛴다고요. 그 몹쓸 바람이 부채질을 한다고요."
정오순 시인이 그렇게 내말을 거들었다.
불정역은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캐낸 석탄을 운송하기 위해 1954년 11월 10일 개설한 역이다. 탄광(炭鑛) 주변 폐역이 다 그렇듯 석탄산업 자체가 몰락하면서 1993년 9월 1일 영업을 중지한 서글픈 역사(驛史)를 가진 역이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봉암사를 찾아가는 차는 왕능장터를 거쳐 가은역이 있는 왕능3리를 지나서서 네비가 가르키는데로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차는 중구산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문경 가은은 길이 두 갈래로 나있다. 가은읍사무소가 있는 왕능1리 장터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이 남부길이요, 기차역이 있었던 왕능3리 역전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는 길이 북부길이다.
왕능1리 장터에서 듬수머리를 지나면서부터 가은의 곡창지대인 관산들이 펼쳐진다. 옛날 전성기때는 150여 호쯤 되었다는 작천동네 앞 관산들은 목고개 너머 문양초등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연갯들과 함께 가은의 곡창지대다. 북부는 밭이 많았지만 남부는 그렇게 논이 많았다.
작천동네 초입에는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사람들은 팽나무가 서있었던 부근을 '팽나무 끌'이라고 불렀다. 겨울철 듬수머리부터 팽나무 끌까지는 바람이 엄청 심했다. 소대한(小大寒) 강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면 바람끝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팽나무끌에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동네가 아차마을이다. 아차, 앗차!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태어났다는 마을이다. 아차마을을 들어서는 초입에는 견훤기념관이 있다.
아차마을에서 영강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십여 리쯤 올라가면 '더대'라는 마을이 나온다. 어릴 적 고모댁이 있었던 동네다. 문양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생 불알친구들이 열하나가 살았던 동네다.
옛날, 아주 옛날 그 어느 봄날! 더대마을 앞 영강변에서 무예를 닦던 견훤이 애마(愛馬)백산(白山)에게 외쳤다.
"백산아, 저 영강변에 서 있는 잘 생긴 소나무를 보아라. 자아, 나는 활을 쏠테니 너는 달려라. 내가 쏜 화살보다 네가 늦게 도착하면 나는 가차없이 네 목을 벨것이다. 알았느냐?"
백산은 알았다는 듯 앞발을 치켜들고, "이휭!" 울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날아갔고, 견훤을 등에 태운 백산은 비호처럼 달렸다. 하얀 갈키를 휘날리며 달려가는 백산의 자태는 천마처럼 우아했다.
강변 소나무 앞에 도착해보니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견훤은 성정이 급했다. 장수가 멀리해야할 조급한 성정을 타고난 견훤이었다. 견훤의 단점이었다. 견훤은 가차없이 애마 백산의 목을 베었다. 검붉은 선혈을 뿌리며 백산의 목은 떨어졌다.
그때였다. "씨우웅!" 날아온 화살이 소나무 밑둥에 박혔다. 떨어져버린 애마 백산의 목을 끌어안고 견훤은 몸부림을 쳤다.
"돼먹지 않은 내 성정머리가 죄없는 널 죽이고 말았구나!
작약산 기슭에 있는 동네 아차마을은 그래서 마을이름이 '아차'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남부길은 밋밋했지만 북부길은 운치(韻致)가 있었다. 마을엔 간간히 교회가 보였고 느티나무 아랜 당집이 있었다. 마을엔 그렇게 토속신앙과 개화기때 구미(歐美)로부터 유입된 기독교가 공존(共存)하고 있었다. 언덕위에 앉아있는 작은 교회는 한 번쯤 들려보고 싶을만큼 친근감이 있어보였다. 수령 수백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아래 금줄을 드리우고 앉아있는 당집은 그 옛날 우리의 할매들이, 어매들이, 소원성취를 기원하던 성스러운 집이었다.
남부에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당집이 북부에는 마을마다 있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돌아가신 우리 할매와 어매들에게 여쭤봐야 정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느티나무와 당집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상생(相生)하고 있다는 사실말이다.
강건너 산 아래엔 30여호쯤 되어보이는 함박골동네가 납작 엎드려있다.
함박골동네는 옛날에 이모댁이 있었던 동네다. 가은중학교11회 동기동창이었던 우상근 친구의 고향동네다.
이종사촌여동생 상희는 대구교대를 나왔다. 상희친구 중에 대구교대 동문인 신명희 선생님이라는 여선생님이 계셨다. 신명희 선생님의 초임지가 영주남부국민학교였다. 1974년, 그당시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신명희 선생님은 휴천동성당 부근, 시범주택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월세를 살고 있었던 시범주택 7호 바로 맞은 편 집, 시범주택 8호가 현미네 집이었다. 신명희 선생님은 현미네 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명희 선생님은 문경 가은에 있었던 문양초등학교 동문이었다. 내가 7회였고 신명희 선생님이 12회였다.
"친구 오빠니까 오늘부터 선생님을 오빠라고 부를게요! 제가 1학년 때, 오빠는 6학년이었지요. 전교어린이회 회장이셨지요 .아침 조회 때 '열중 쉬어, 차렷' 하고 구령을 부르던 오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해서, 나는 졸지에 날씬하고 예쁜 초등학교 여선생님을 누이동생으로 얻을 수가 있었다. 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땡을 잡은 셈이었다.
우린 그해 봄, 의기투합하여 제1가흥교 바로 아래 공터에 돌로 얼기설기 울타리 쌓아올려 대여섯평 동산을 만들었다. 그곳에 봉숭아와 백일홍, 채송화와 과꽃, 맨드라미와 코스모스를 심었다. 키다리 해바라기도 두어 포기 심었다. 동산 한복판엔 '꽃동산'이라는 팻말도 세웠다. 물론 명희가 데리고 온 영주남부국민학교 4학년 2반 아이들이 많은 힘을 보탰다. 원조꽃동산은 그렇게 탄생했다.
중구산을 지난 차는 도타이 마을에 다다랐다. 다리 건너에 있는 폐교가 이종사촌여동생 상희의 모교, 희양국민학교다. 멀리 북쪽하늘 아래 희양산(曦陽山)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희양산은 바위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이다.
"아~" 일행은 모두 탄성을 자아냈다. 희양산이 주는 위압감때문이었다.
"세상에, 정말 대단하네요! 선생님, 저렇게 웅장한 바위산도 있네요. 진안 마이산보다 더 웅장하네요."
전북 출신 정오순 시인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차는 봉암사 초입에 들어섰다.
희양산의 웅장한 모습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왔다. 희양산! 천하제일의 그 어떤 문장가도 결코 녹여내지 못하리라. 수수억년 비바람, 서리속에 온몸 내맡기고 단련된 희양산의 웅장함을, 절묘함을 글로서 녹여내지 못하리라.
"저 개천가에 암반 좀 봐요. 보리타작할 만큼 널따랗지요."
"그러네요. 선생님, 정말 대단하네요!"
김희영 시인이 그렇게 동조했다.
"산문을 들어서서 산기슭으로 한참 올라가면 '옥석대'라고 있어요. 조금 더 올라가면 '백운대'도 있고요. 두곳 다 빼어난 절경이랍니다. 영주의 희방계곡보다 더 풍광이 뛰어나지요."
가은읍소재지 왕능장터에서 남부길을 따라 10여 리 올라가면 대방산 아래에 털모산이라는 마을이 있다. 예전에는 20여호쯤 되었는데 요즘은 몇호나 되는지 모를일이다. 마을 뒤 산 아래엔 '털모산 굴'이라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초입은 마당만큼 넓었다. 그곳에 황톳불을 놓으면 20여 리 떨어진 옥석대 바위틈으로 연기가 새어나온다고 했다.
일제강점기까지만해도 털모산 동굴 앞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풍물놀이 시연(試演)이 벌어졌다고 했다. 대회엔 읍내 각 마을과 멀리 마성면에서도 여러 마을이 참가했다고 한다. 풍물놀이는 민중을 결속시키는 묘한 마력이 있다고 한다. 해서 일제(日帝)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일제후반기부터 풍물놀이 시연을 금지시켰다고 했다.
옛날, 어릴 적 어매가 들려주신 얘기 한 토막, 사람이 죽어 저승문을 들어서면 염마왕이 묻는다고 했다. "살아생전 양산절 가봤냐고. 안비 물맞아 봤냐고." 양산절은 봉암사의 속칭이다. 절 아래 양산이라는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불리워졌을 것이다. 안비 역시 수안보의 속칭이다. '안비 물맞아 봤냐?'를 요즘말로 직역하면,'수안보 온천욕해봤냐?'이다.
옛날 통일신라 시대 때, 불교가 교종과 선종, 5교9산으로 나뉘어졌을 때, 희양산 봉암사는 9산의 한 종파였다.
봉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다. 879년(헌강왕 5)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智詵, 智證國師)이 창건했다.
희양산은 하늘이 감춘 산이고, 봉암사는 20여 년전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문턱이 높은 절이다.
봉암사를 맨 처음 찾아갔을 때가 초등학교5학년때였다. 가을소풍때였다. 5, 6학년생들이 함께 봉암사로 소풍을 떠났다. 나의 모교, 문양초등학교에서 봉암사까지는 삼십여 리 길이었다. 하룻밤 자고 올 양으로 우린 길양식으로 쌀 한사발을 까만 책보에 싸들고 길을 나섰다. 인솔은 5, 6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동행하신 교감 선생님께서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우린 삼십여 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갔다. 도타이 마을에 다다르자 거대한 바위산 희양산이 보였다.아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저어기 방구산 봐라. 산이 마캉(전부) 방구로 되어있다!"
아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봉암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새벽이었다.
"대앵~!"하고 새벽예불을 알리는 쇠북이 울었다. 6학년 중에 신정옥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키가 컸고 말라깽이였다. 좀 얼띤 아이였다. 쇠북소리에 놀란 정옥이가 그만 눈을 까뒤집고 까무러쳤다.
그러니 난리가 뒤집어졌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바늘로 딴다. 그렇게 야단법석이 지나간 끝에 정옥이는 "뽕!"하고 방귀를 뀌더니 굵다란 눈을 껌벅였다. 식은 땀꽤나 흘리셨을 선생님들께서는 그제서야,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셨다.
번을 서던 안내원이 말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길은 바닥이 저 개천가 암반처럼 암반으로 되어있어요. 전두환 정권 때, 이렇게 시커멓게 아스팔트포장을 해버렸지요. 원상회복하려고 계획이 되어있어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되고요. 훼손된 자연은 복원시켜야지요."
"예, 맞아요. 그럼요. 훼손된 자연은 반드시 원상회복을 시켜야지요. 할 수만 있다면요."
내가 그렇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런데 희영씨가 들고일어섰다.
"왜 이렇게 좋은 경관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이 곳을, 못보게 통제를 하나요?"
모처럼 시간을 내어 찾아온 관람객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좋다는 경관(景觀)을 보지못하고 돌아서야 한다는 서운함이 배어있는 말이었다.
"예,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이 곳 한 곳이라도 그 옛날, 태고적 원형그대로 남아있어야지요. 개방되면 십중팔구 훼손되니까요. 선생님들께서는 산이 앓는 소리를 들어보셨나요?"
필자의 가은중학교 후배라는 초번(哨番)지기는 달변가였다.
초번지기의 달변을 뒤로하고 우린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섰다. 차는 도타이 마을을 지나서 중구산 마을을 지나간다. 중구산 마을엔 한말의 전설적 의병장인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이강년은 1858년 12월30일 도타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가은 완장리에서 태어났다. 이강년은 키가 8척 2치나되었고 부리부리한 봉의 눈을 가지 호걸이었다. 이강년은 1896년 2월 23(음1월 11일) 거병한 이래 13년 동안을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를 넘나들며 왜병과 싸웠다.
그는 1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왜병과 싸우면서도 단 한번도 백성에게 누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강년은 부하 장졸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의로운 의병이다. 우리는 나라의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싸우는 백성의 군대다. 그 누구든 백성으로부터 밥 한 그릇도, 적삼 하나도 얻어먹거나 입어서도 안 된다. 이는 군령이다. 만약 이 군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나는 가차없이 그 자를 참할 것이다."
이강년은 그러한 전설적 의병장이었다. 이강년은 집을 나서며 노모께 이렇게 하직인사를 했다. "나라가 왜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존망이 위태로운 이때에 소자 비록 용렬하오나 저 포악무도한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나라의 원수를 갚는데 이 한몸 바치겠습니다. 다만 어머니께는 불효가 크오니 용서 하소서."
구한말 안동부사 김석중은 소문난 악질 친일파였다. 그런 안동부사 김석중을 이강년이 잡아다가 농암장터에서 목을 베어 공개처형, 효수시켰다는 얘기가 농암면민들 사이에 구전되어오고 있었다.
일제강정기까지만 해도 농암장이 가은장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농암장은 장세(場勢)가 함창장에 버금간다고 했다. 농암장은 가은장터에서 서쪽으로 8km쯤 떨어진 곳, 청암중학교 앞에 있는 장이다. 옛날에는 우시장이 유명했다고 한다.
김석중은 두 팔이 꼭꼭 묶인 채 목고개를 넘고 가실목 재를 넘어 농암장터로 압송되었다.
장터바닥에 꿇어앉은 김석중에게 이강년이 일갈(一喝)했다.
"내 너의 죄를 일러주노니 듣거라.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죄가 그 첫번째요,
고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리지 않고 도탄에 빠뜨린 죄가 그 두번째요,
강상(綱常)의 도(道)를 어지럽힌 죄가 그 세번째니라!"
농암면민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되었던 이 얘기는 실증(實證)이라도 하듯, 2016년 8월15일, KBS1방송에서 '전설의 의병장 운강 이강년'이란 다큐로 제작 방영했다.
기적소리 멎은 역은 썰렁했다.
그 옛날 먹뱅이를 돌아 나온 기차는 가은중학교 앞을 지나서고 저쯤에 철교가 보이면, "깨에엑!" 소리도 요란하게 기적(汽笛)을 울리며 달려오곤 했었다.
초등학교3학년 때, 기차를 첨 봤다. 동식이와 같이 다라골 소풀베러가서였다.
"저어기 저게 기찬기라!" 동식이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엔 기다랗게 생겨먹은 기차가 읍내 산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차는 참으로 길었다.
기차는 예나 지금이나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터널에 들어설 때, 철교를 지나갈 때, 역구내에 들어설 때는 반드시 기적을 울렸다.
폐역이 되어버린 가은역 대합실 한켠에 개설한 카폐 '가은역'에 들어선 우리일행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리쉼을 했다. 카폐 '가은역'은 필자의 가은중학교 후배라는 50대 후반의 여자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가은! 석탄산업이 전성기였던 60, 70년대는 한창 호황을 누리던 고장이었다. 역전거리엔 술집이 즐비했다. 밤이면 술꾼들로 흥청거렸다.
강건너 왕능4리엔 은성광업소 사무소가 있었고, 극장이 있었다. 그 시절엔 아이노리라는 합승이 있었다. 아이노리는 정원이 20여 명쯤 되는 미니버스였다. 말이 정원이었지 승객은 늘 배가 넘는 40여 명을 육박했다. 좁다란 차안이 미어터질 듯했다. 해가 넘어가고 영화를 상영할 시간이 되어가면 아이노리는 남부와 북부를 쉴새없이 쫓아다니며 손님을 실어날랐다.
장터에서 기차역을 올라가는 중간쯤에 성당이 있었다. 신부님은 독일분이셨다. 신부님은 키가 엄청 컸고 얼굴은 온통 누르스럼한 털로 덮여있었다. 신부님은 지씨였다. 물론 한국식 성이었다. 사람들은 신부님을 '지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신부님은 까만 오토바이를 타고 성유공소에 다녀가곤 하셨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천주교 집회장소를 일음이다. 신부님은 주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이렇게 강론하시곤 했다. "교우 여러뿐, 밀까루도 믿지말고오, 우윳까루도 믿지 말고오, 빤드씨 천주교회를 믿으야 합네다!" 그 당시엔 밀가루나 우윳가루 같은 구호품을 받으려고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불과 사오년 밖에 지나지 않은 그 때, 대한민국은 지구상의 최빈국이었다. 지금의 아프리카 미개발국 같았다. 외국의 원조에 의해 나라의 틀이 유지되었고, 경제가 움직이고 있었다. 원조는 주로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선진국으로부터 받았지만 기독교를 통하여 들어오는 민간원조도 만만치 않았다. 선교사로 온 신부나 목사는 본국으로 달려가 전쟁이 할퀴고 간 한국의 참상을 설명하고 자선단체로부터 구호품을 받아 실어왔다.
가은선은 1955년 9월15일, 가은일대의 무연탄 개발을 위해 산업철도로 개설되었다. 무연탄은 이나라 전체가구의 77%가 사용했던 연탄의 원료였다.
가은에서 김천까지의 기찻길이 경북선이다. 당시 경북선을 주름잡았던 깡패는 가은읍 성유리 출신의 노강천이었다.
가은의 협객 신대명이는 깡패 노강천이보다 싸움실력이 몇 수 위라고 했다.
옥녀봉 기슭에 하얀 조팝꽃이 흐드르지게 피어난 1958년 5월하순 어느 날이었다. 협객 신대명과 지 신부님이 기차역 앞 공터에 마주보고 서있었다.
한판 벌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그렇게 서있는 발단은 이러했다. 점촌장에 가려는 교우 한사람을 오토바이에 태우고와서 내려주고 가려는 신부님 앞을 역전거리 소악패들이 막아섰다.
"오토바이 차암 조옸네에."
"신부니임. 우리도오 오토바이 한 번 타봅시다아!"
소악패들은 그렇게 시비를 걸며 신부님 오토바이를 막아섰다.
"왜 이러십네까? 비켜주십시오. 나쁜 짓입네다."
"씨팔, 오토바이 한 번 타보자카는기 뭐가 그리 나뿐데!"
소악패들은 신부님 어깨를 툭툭치며 시비를 걸어왔다.
"이러면 안됍네다. 비켜주십시오."
신부님은 다시 한 번 사정을 했다.
"개코 같은 소리하고 나자빠졌네. 안돼긴 뭐가 안돼!"
급기야 소악패들은 신부님을 빙 둘러싸고 발길질 주먹질을 해대며 싸움을 걸어왔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신부님은 직감했고, 곧바로 반격했다. 순간, 소악패 네댓명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권투로 단련된 신부님의 가벼운 잽 한방씩을 맞은 소악패들은 추풍낙엽떨어지듯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신부님이 뻗은 주먹은 겨우 잽 한방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신부님은 학창시절 권투선수였다고 했다. 모여섰던 구경꾼들이 하나같이 혀를찼다.
월광사진관은 기차역이 마주 보이는 역전거리에 있었다.
건물 일층엔 사진관과 포목점이 있었고 이층은 그 유명한 청파다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청파다방은 아베크족들의 아지트였다. 또 기다닿게 땋은 머리끝에 갑사댕기를 물린 촌색시들이 예비신랑을 만나 선을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면장이나 지서주임, 은성광업소장 같은 지역의 유지들이 즐겨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모던걸이나 준수한 젊은이들도 심심찮게 들렸고, 이따금 초, 중학교 선생님 같은 인테리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가은의 협객 신대명이도 청파다방이 아지트였다.
그 날도 신대명은 청파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시끌벅적해서 바깥을 내다보았더니 그모양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이땅의 젊은이들이 성직자인 외국인 신부에게 두들겨 맞아 비실비실 도망가는 꼬락서니에 감정이 상했다. 다방을 나선 신대명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려는 신부님을 막아섰다.
"신부님, 가은의 협객 신대명입니다. 신부님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서른 다섯살 신대명이는 그렇게 신부님을 막아섰다.
"싸움을 거는 당신은 또 누구십네까? 싸움하기 싫습네다. 그러니 저리 비키십시오. 부탁입네다."
"안 됩니다.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고 있습니다. 명예로운 결투말입니다."
"나는 당신과 싸움하기 싫습네다. 골목길의 조무라기들과 당신은 격이 다르지 않습네까? 오해하시면 안 됩네다. 조금 전에 한 싸움은 거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어쩔 수 없는 싸움이었습네다."
"격이 다르다고 했습니까? 신부님!"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네까? 협객이라고."
"신부님, 협객이 뭔지 아십니까?"
"주먹을 약자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 서양의 기사 같은 사람, 정의를 위해 주먹을 쓰는 사람이라고 알고있습네다."
"거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싸우셨다! 신부님, 실례지만 한국에 오신지 몇년 되셨습니까?"
"내 나이가 올해 마흔다섯입네다. 서른다섯에 한국에 왔으니까 꼭 십년 됐습네다."
협객은 협객을, 싸움꾼은 싸움꾼을, 한 눈에 척 알아보는 법이다.
'저 자는 내가 넘을 수 없는 산이로구나. 저 자는 거리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싸움을 했다고 한다. 협객인 내가 할일을 성직자인 저 자가 했다. 뭇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성직자인 저 자를 내가 어떻게 뛰어넘는단 말인가! 그래, 사죄하자. 용기(勇氣)도 협객이 지녀야할 덕목이 아닌가.'
"신부님, 한국사람 다 돼셨습니다. 이 싸움은 신부님이 이기셨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성직자시고 인생선배이신 신부님께 버릇없이 대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네다. 내가 졌습니다. 당신이 이겼습네다."
'그래, 이참에 건달생활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자. 할 수만 있다면 천주교에 입문하자. 어쩌면 저 외국인 신부를 만난 것도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일지도 모른다.'
"신부님, 저도 가토릭 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먹질이나 하던 저도요."
"예, 환영합네다. 그 누구든 예수님 제자가 될 수 있습네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고 계시니까요."
"신부님, 막걸리 마실줄 아십니까? 천주교 신부님은 예배당의 목사님 하고는 달라 술도 마신다고 들었습니다."
"예에, 텁텁한 막걸리 아주 좋아합네다."
"그래요. 신부님, 반갑습니다. 언제 기회봐서 제가 막걸리 한 잔 사겠습니다."
"예,고맙습네다."
천주교 가은성당의 전설적 전교회장 신대명은 그 일을 계기로 탄생했다.
1980년에 접어들자 세상은 급변해 갔다. 국민의 의식수준도, 삶의 질도 높아져만 갔다. 난방과 취사의 주류를 이루었던 연탄이 기름으로 대체되어갔다. 인건비의 상승과 채산성의 하락으로 연탄은 더 이상 기름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해서 정부에서는 1986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발표했다. 가은선 중 진남역 가은역 구간, 9.6km은 이로 인해 2004년 4월, 철도청에 의해 공식 폐선되었고 가은역도 영업을 중지했다.
그러나 가은역은 보존가치가 있다하여 현재 대한민국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있다. 가은역의 길주소는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2441이다.
차가 멈춰 선곳은 예천 용궁장터거리였다. 빨간 색 바탕에 흰 글자로 새겨진 '단골식당'이라는 간판이 무척 선명하게 보이는 순대국밥집앞이었다.
언제부턴가 용궁은 순대국밥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순대국밥이 지역의 브랜드로 자리매김 해가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뜨끈뜨끈한 순대국에 밥을 말아 후후 불어가며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어댔다.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의사의 금주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금주령을 무시하고 계속 도둑술을 먹어댔더니,'알아서 하라!'고 경고를 했다.
노년의 인생은 이런저런 성인병 하나 둘을 지니고 살아간다. 물론 다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노년의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네가 예상외로 많다는 얘기다. 그것은 어쩌면 자식낳아 기르고 교육시키며, 시집장가 보내느라고 얻은 허허스런 공로패일지도 모른다.
카페는 '단골식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땐 꽤 넓직한 마당 한켠에 나와 띠동갑쯤 되어보이는 노신사 세분이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노년의 여유가 무척 멋스러워 보였다. 질곡(桎梏)의 세월을 살아 온 인생선배들이었다. 고개숙여 예를 드렸다. 인생 후배가 인생 선배에게 드리는 예우였다. 오순씨와 희영씨도 따라했다. 그분들도 빙그레 웃으며 답례를 보내왔다.
카페를 나서면서 오순씨가 물어왔다. "선생님, 박목월(朴木月) 시인의 러브스토리를 아시나요?"
'그래, 러브스토리 없는 시인이 어디 있겠나! 목석 같은 남정네는 시인이 될 수 없느니.'
예부터 시인은 러브스토리를 몰고 다녔다. 정운 이영도와 청마 유치환의 러브스토리는 문단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스물아홉 한창 나이에 요절한 박인환 시인은 여자들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 도도했다는 전설적 수필가 전혜린 마저도 박인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무는 고요하고 싶었지만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댔다. 주위의 여자들이 박인환을 흔들댔지만 박인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박인환의 여자는 오로지 그의 아내뿐이었다.
박인환은 술을 엄청 좋아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그는 그 좋아했던 막걸리도 맘껏 마시지 못했다고 했다. 1956년 5월, 이상(李箱)의 기일을 맞아 밤새워 폭음했던 박인환은 심장마비로 타계하고 말았다. 천재시인 박인환은 29살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 요절했다. 가난했지만 댄디 신사였던 박인환을 잃은 것은 시대의 아픔이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 전문
초등학교6학년때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를 만났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지막히 읊으시는 시가 좋아서 한 번 두번 따라 읊다보니 외우게 되었다. 박목월 시인은 1916년 1월 6일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박목월은 1935년 경북 대구에 있는 계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뒤 1946년무렵부터 교직에 종사, 대구 계성중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교수로 재임하다 동대학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했다.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과 함께 펴낸 시집 '청록집'이 유명세를 타면서 문단에서는 그들 세 시인을 청록파(靑鹿派)시인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박목월은 서른여섯의 중년이었다. 물론 평균수명이 요즘보다 현저하게 짧았던 그 땐,그랬다는 얘기다. 장가 안 간 젊은이가 수두룩한 요즘이야 나이 서른여섯은 젊은 층에 속한다.
그 당시 박목월은 Y대 국문과교수로 재직중이었다.
박목월의 제자 중에 고희정, 고희영이라는 두 여대생이 있었다. 나이 스물넷 스물셋인 자매였다. 언니 희정양은 4학년이었고, 동생 희영양은 3학년이었다. 자매는 박목월에게 동시에 대시해왔다. 두 아가씨의 파릇파릇한 가슴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승인 박목월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두 자매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동생 희영양이 더 적극적이었다.
될 법한 일이 아니었다. 불행중 다행이었을까! 언니 희정양은 결혼을 했다. 이제 동생 희영이만 따돌리면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맘먹은 목월은 친구인 이 아무개 시인에게 희영양을 설득해보라고 부탁을 했다.목월의 부탁을 받은 이 시인은 희영양을 찾아갔다.
"희영양, 이제 그만 박 교수를 놓아줘요.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목월은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잖아요. 어찌해볼 도리가 없잖아요. 목월도 희영양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목월을 놓아줘요. 진정 목월을 사랑한다면!"
지금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연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는 그 유명한 말, 희영양의 대답은 그말이었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친구로부터 그 얘길 전해들은 목월은 내려놓았다. 모든 걸 다 내려놓았다.
한 여자의 남편도, 사랑하는 자식들의 아버지라는 자리도, 뭇사람들이 저만큼 올려다보는 대학교수라는 위치도, 조선천지가 인정하는 대시인이라는 명예도, 다 내려놓았다.
그리곤 떠났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목월은 미련없이 떠났다. 희영이를 데리고 제주도로 훌훌 떠나가버렸다. 목월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목월의 부인은 현숙한 여자였다. 남편과 희영양이 제주도로 떠난 얼마 뒤, 넉넉하게 돈을 넣은 봉투 하나를 수중에 지니고, 남편과 희영양의 새옷 한 벌을 준비해서 두 연인을 찾아 제주도로 갔다.
남편과 희영양의 행색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두 연인 앞에 준비해간 옷과 돈봉투를 내밀며 부인이 말했다.
"옷들 갈아입어세요. 이 돈은 생활비로 보태 쓰시고, 제주도 풍물(風物) 구경하시다 고생이다싶어면 돌아들 오세요."
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희영은 그만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사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아니우. 희영씨, 희영씨 같이 파릇파릇하고 예쁜 아가씨가 내 남편을 사랑했다니 감동이네요. 그래요 희영씨,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부인이 나가버리자 희영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 그만 여기서 헤어져요. 진정 선생님을 사랑했지만 그래서 괴로웠지만, 선생님을 잊으려고 이앙다물게요."
"그래, 니말대로 하자구나.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구나. 나도 너를 이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했다."
목월이 희영과 헤어지면서 희영을 위해서 지은 노래가 그 유명한 '이별의 노래'다.
카페를 나서면서 오순씨가 불렀다. 이별의 노래를.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1절이 끝나자 희영씨가 2절을 받았다.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희영씨가 2절을 끝낼 무렵 우리는 영주로 돌아가려고 차에 올랐고, 마지막 3절은 내가 이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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