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좋아는 하지만 잘 부르지는 못합니다. 음치를 조금 면했을 정도니까요.
그래도 혼자일 때는 제법 한가락한답니다.
막걸리라도 한잔 했다 하면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정 올려다보고
손바닥 장단 맞춰가며 신명 나게 한곡 뽑아댄답니다. 집사람이 있을 땐
난리가 뒤집어지니까 없을 때 부른답니다.
듣는 이라야 벽과 창문, 텔레비전과 앉은뱅이책상, 무질서하게 방바닥에 쌓여있는
책밖에 없으니 부담될 것도 없답니다.
박자를 띵가 먹던, 음정이 불안정하던 탓할 사람이 없걸랑요.
여기서 잠깐, '띵가 먹다'는 '놓치다'의 경상도 문경 지방 사투리랍니다.
내 블로그는 조선 팔도에서 날래 날래 오신 이웃님들로 구성되었으니 소통(疏通)상
해설을 첨부했습니다.
내가 여덟 살이었을 때, 나보다 일곱 살 더 먹은 우리 집 둘째 누야(누나)는
초등 6학년이었습니다. 누나는 내게 '최영 장군' 노래를 가르쳐줬습니다.
그때 누나에게 배웠던 최영 장군 노랠 문경아제가 한번 불러볼 테니
듣기 거북한 이웃님은 귀 막으시라요.
씩씩하게 불러야 한다고 누나가 말했으니 팔 휘저어가며 씩씩하게 부를 테니
보기 싫은 이웃님은 눈감으시라요. ㅎㅎㅎㅋㅋㅋ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싸우셨으니
그 이름 거룩하다 최영 장군
내가 다녔던 모교, 문양 국민학교는 경북 문경 가은에 있었던,
전교생을 다 합해도 4백 명에 못 미치는 조그만 시골학교였습니다.
지붕을 짚으로 엮어 이엉으로 덮은 초가(草家)였답니다.
교실은 맨땅에 가마니가 깔려있었습니다. 요즘에 비하면 전설 같은 학교였지요.
3학년 때였습니다. 늦가을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결근을 하셨는지라 음악시간에
4학년 담임이셨던 강철원 선생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훤칠한 키에 약간은 곱슬머리, 준수한 얼굴의 강철원 선생님은 미남 중에 미남,
상남자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선생님은 학교 가근방 마을에 살고 있는 아가씨들
가슴꽤나 울렸을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강철원 선생님께 '귀뚜라미 우는 달밤'이라는 노랠 배웠답니다.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에
멀리 전학 간 동무가 그리워져요
정답게 손잡고 뛰놀던 내 동무
그곳에도 지금 귀뚜리 울고 있을까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에
만나고 싶은 동무에게 편지나 쓰자
즐겁게 뛰놀던 지난날 이야기
그 동무도 지금 내 생각하고 있을까
4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인기 선생님은 풍금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시간이면 다른 선생님과 수업을 바꿔하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 배웠던 노래가 딱 한곡 있습니다. '바다 건너 오천 리'였지요.
바다 건건 오천 리 가기만 하면
울타리엔 호박넝쿨 시들어지고
지붕 위엔 흰박들이 고이 잠자는
오막살이 우리 집 한 채 있지요
가정방문 오셨다가 아버지께 막걸리 대접받고 골목길을 휘적휘적 돌아가시는
선생님 옷차림은 회색 바바리코트였습니다.
그때의 선생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재작년 10월,
추풍령 너머에 있는 경부선 중간역, 충북 영동군 황간역 이층 갤러리엔 시화전이 열렸습니다.
문경아제가 출품한 작품 시, '박꽃'은 선생님께 배웠던 노래, '바다 건너 오천 리'를 떠올리며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박꽃
/김동한
소년이 태어나던 날밤
소년의 집 초가지붕 위엔
하얀 박꽃이 피었습니다
청년으로 자라난 소년이
장가가던 날밤
소년의 집 마루에는
곱디고운 청사초롱이 걸렸습니다
꽃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할아버지 가슴에
하얀 박꽃이 피었습니다
그 옛날,
소년이 태어나던 날밤처럼
하얀 박꽃이 피었습니다.
예쁜 두 손녀딸이
예쁜 두 손녀딸이
할아버지 가슴에
할아버지 가슴에
새하얀 박꽃을 피웠습니다
6학년 때 담임은
오상현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우리 학교가 첫 부임지였답니다.
내가 5학년 때 4학년 담임을 하시다가 6학년이 되자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습니다.
나는 정해생 돼지띠지요. 초등 6학년 때, 열네 살이었습니다.
쉰두 명의 동무들 중엔 정해생 돼지띠 동갑내기가 나를 포함해 열한 명이었습니다. 한 살 더 많은 열다섯 살 개띠가 두엇,
열두 살 소띠가 다섯, 나머진 모두 열세 살 쥐띠였습니다. 교실은 마구 쥐들의 세상, 쥐판이었지요.
오상현 선생님은 시를 잘 읊으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께서 읊으시던 청록파 시인, 박목월 시인의 청노루를
귀동냥으로 배워 달달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나그네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턱이 없었죠.
모른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나그네를 읊어셨습니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렇게 귀동냥으로
선생님께 시를 배웠고
먼 훗날 시인이 되었습니다.
서두에 얘기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첫 부임지가 우리 학교였다고,
나중에 알았습니다. 선생님의 고향이 의성이라는 것을.
대충 어림잡아 나보다 여섯 살 쯤은 나이 많은 김길자 선배는 의성여고를 졸업했습니다.
내가 틴에이저였던 1960대 초반, 즐겨 읽던 책중에 '학원(學園)'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핸가 그 학원지에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밤 눈길에서'라는 수필을 읽었습니다.
지은이는 의성여고 2학년 김길자였습니다. 나는 김선배의 수필을 읽고부터
글을 써보겠다며 한편 한편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고향 얘기를 하다 보니 얘기가 좀 빗나갔네요
어릴 적, 나는 좀 시건방졌습니다. 십대의 반항이랄까요.
스물한 살에 교단에 서신 선생님께서도
젊을 혈기를 누르지 못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옆자리 짝쿵인 신현태와 장난질하다 선생님께 걸렸습니다.
선생님 앞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선생님의 꾸중을 듣고 현태는 잘못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질 않았습니다. 되레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장난 좀 쳤기로 왜 그리 꾸중이 심하냐고
대들었습니다.
순간 선생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일그러졌습니다.
윗도리를 벗어던진 선생님은 날 개 패듯 팼습니다. 그날, 나는 선생님께 얼굴이 퉁퉁 붓도록
얻어맞았습니다.
이듬해 우리를 졸업시킨 선생님은 6월엔가 군에 입대하셨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우리가 졸업 선물로 해드린 손목시계를 식목일날 산에 나무 심으러 가셨다가
잃어버리시곤 알찌근해하셨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선생님은 얼마 뒤 초등학교를 그만두시고 중고등학교 교사로 전직하셨습니다.
국어담당을 하셨답니다. 선생님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실 수 있는 과목이었죠.
선생님께서는 대구에 있는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경북여고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감하셨습니다.
당시 경북고등학교와 경북여교는 대구, 경북에서는 최일류 고등학교였답니다.
작년 봄 어느 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자네 동시 한편 보내주게. 내가 시력이 안 좋으니 포인트 크게 출력해서 우편으로 보내주게."
"예,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 부탁을 일 년이 넘도록 들어드리지 못한 나는 제자랄 것도 없지요.
게으름뱅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랍니다.
내일은 열일을 제쳐놓고 동시 두 편 시조 두 편 출력해서 선생님께 보내드리렵니다.
용서 구하면서요.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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