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픽션

인연(因緣)/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9. 1. 12. 09:17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55분이었다.

곁엔 집사람이 세상모르게 자고있었다. 감기몸살로 고생이 말이아니었는데, 깊게 잠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며 한 녀석 한 녀석, 손꼽아가며 허공 속에 모습을 그려가며 빙그레 웃어본다.

시와 함께 동화와 동시도 쓰는 나에겐 아이들은 아주 소중한 존재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예쁜 우리 집 두 손녀딸을 떠올려본다.

큰놈이 열두살 초등학교5학년이고, 작은놈이 여덟살 1학년이다. 내가 세상에 살아있어야, 살아남아야할, 동기부여를 해주는 두 손녀딸이다. 할아버지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우리 집 두 손녀딸, 김신우와 김시우다.

경기도 안양에 살고있는 큰손녀딸이 꼬맹이었을 때, 영주에 내려오면 참 많이도 업어줬다. 서천둔치뚝방길이나 집 근방 골목길을 손녀딸을 들쳐업고 좋아라하며 돌아다녔다. 아까워서 조금도 걸릴 수가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마냥 돌아다녔다.

네살때까지 업고 다녔던 큰손녀딸이 다섯살이 되자 업어주질 못했다. 아이가 똥깨가 무거워져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똥깨'란 어린아이의 몸무게를 뜻하는 경상도 문경지방사투리이다. 지금도 사어(死語)가 아닌, 살아 숨쉬는 생동감있는 토속어(土俗語)로 이어나가길 바램해본다.

둘째손녀딸은 지 언니만큼은 못 업어줬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한해 두해 세월이 가는만큼 난 늙어버렸고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덟살 막둥이손녀딸이 여섯살 때였다.

봄이었다.

열살에 접어든 지 언니보고 막둥이가 이렇게 쫑알됐다.

 

"난 남자는 싫어!"

 

콩알만한 막둥이가 남자는 싫다고했다.

지 언니가 물었다.

 

"왜에?"

 

막둥이가 요렇게 대답했다.

 

"그냥. 그래도 할아버지는 좋아."

"할아버진 왜 좋은데."

"할아버지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여섯살 막둥이손녀딸도 아는 듯했다.

 

땅꼬마이었을 적부터 큰손녀딸 신우는 아주 예뻤다.

아이를 업고 나서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했다.

"손녀딸이 엄청 예뻐네요!"

 

근데 막둥이 손녀딸은 그렇질 못했다.

갓난아기는 웬만하면 예쁜데 우리 막둥이는 그렇질 못했다.

막둥이가 태어나던 날 사진을 보내왔는데 너무도 기가막혀서 한숨이 나왔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민머리에다가 눈은 퉁망울 같았고, 입은 볼품없이 크기만 했다. 그기에다 귀는 먼 별나라에서 온 ET귀였고 코는 주먹코였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남자인 내가 그러했을진데 아이들 할머니인 집사람은 어떠했을까. 해서, 집사람을 위로해줬다.

"당신 두고 봐. 우리 막둥이 젖잘먹고, 똥잘싸고, 쌔근쌔근 잠잘자면 금방 예쁘질테니. 내말이 맞나 안맞나 기다려봐!"

 

할아버지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려는듯 막둥이는 젖 잘먹고, 똥잘싸고, 쌔근쌔근 잠 잘자고, 잘울며 무럭무럭 잘자랐다.

지 언니, 신우는 몸이 좀 약했는데 막둥이는 아주 건강했다.

백날이 지나고, 또 첫돌이 지나가고, 설을 쇠고 세살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막둥이손녀딸 시우는 야금야금 조금씩조금씩 예뻐져갔다.

민머리에 까만 머리칼이 돋아났고, 퉁망울같았던 눈이 반짝반짝 빛이났다. 외계인 귀같던 말귀가 제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네살때로 기억된다.

막둥이가 안방에서 놀고있었다.

어깨가 뻑적지근했다. "아이구 어깨야!"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막둥이가 들었는지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이구 시원하다!"

'아이구, 우리 가문에 효손났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막둥이를 덜렁 치켜들고 방바닥에 벌렁 들어누웠다.

"부릉부릉!"

비행기가 날아간다. 비행기가 된 막둥이는 좋아서 깔깔대며 웃어댔다. 조그만 빨간 경비행기가 널따란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잘도 날아다녔다.

 

방학이 됐는데도 두 손녀딸은 내려오지 않는다.

엄청 보고싶은데 내려오지 않는다.

큰손녀딸 신우는 리코더 연주때문에, 손재주가 좋은 막둥이는 만들기하러 학교에 나가야하기에 할아버지댁에 못내려온다고 했다.

요즘 아이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 갇혀 지내야 하기때문이다.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새장에 갇혀 노래부르는 새와 같다. 푸른하늘 그리며 노래부르는 새와같다!

 

2005년 5월, 아파트에 첨 일하러 갔을 때, 승하는 열두살 초등학교5학년이었다.

고리니마냥 마당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놀던 승하가 어느 날 내게로 달려왔다.

 

"어저씨이, 저 부반장됐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래에, 기분좋겠구나."

"예, 아저씨! 기분 억수로 좋아요."

 

승하는 고라니로 변화더니 동생, 재정이가 노는 곳으로 껑충껑충 뛰어갔다.

 

수정이는 그때 일곱살이었다.

동무 지우와 함께 유치원 졸업반이었다.

두 녀석은 엄청 친했지만 성격은 판이했다.

수정이는 순했고, 지우는 똑소리가 날맘큼 똑부러졌다. 심부름을 시켜보고나서 두 아이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날도 유치원에 다녀온 수정이는 오후가 되자 아파트마당으로 살랑살랑 기어나왔다.

한살 적은 남자친구 상윤이와 놀던 수정이가 내게 속닥거렸다.

 

"아저씨이, 상윤이가요오 부끄럼병에 걸렸어요!"

"에그 저런, 고약한 병에 걸렸구아."

 

그 얘기를 상윤이 엄마에게 들려줬더니, "예, 우리 상윤이가 숫기가 좀 부족해요." 라고 응대했다.

상윤이 엄마는 컴 도사였다. 노트북에 글을 쓰다 막히면 상윤이 엄마에게 물어보곤했다. 일테면 상윤이 엄마는 내게 컴퓨터선생님이셨다.

 

먼산에서 산비둘기가 구성지게 울어댔다.

 

구구구구 계집죽고 구구구구 자식죽고

앞마당에 매어놓은 암소죽고 구구구구

 

구름 한점 없는 5월의 하늘은 엄청 파랬다.

 

그 이듬해 3월 근무지가 바뀌어 1초소에서 2초소로 올라갔을 때, 수정이 동생 수빈이는 엄마뱃속에 있었다.

쬐그만게 그래도 생명체라고 아무도 보아주는 이가 없어도 해죽이 웃기도하고, 발길질도 했다. 그렇게 엄마뱃속에서 열달을 보내고 2006년 6월, 계절이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응애!" 하고 첫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밀었다.한 생명이 세상밖으로 나오는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여기서 잠깐,

동양과 서양은 생명을 인지(認知)하는 개념이 상이하다.

동양에서는 태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으로 인식하지만 서양에서는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싯점부터 생명으로본다.

그런 맥락에서였을까. 서양은 물질문명이 발달했고 동양은 정신문화가 발전했다.

 

송화라는 아이가 있었다. 송화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송화는 열살 초등학교3학년이었다.

강은이란 아이도 있었다. 송화보다는 훨씬 키가 작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송화보다 1년 아래인 초등학교2학년이었다.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러 나설 때, 날 만나기라도할양이면 두 아이는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봄이었다. 104동 뒤 잔디밭에 잔디가 누르스름한 헌옷을 벗어던지고 파릇파릇한 초록옷으로 갈아입는 5월 어느 날이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송화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이, 아저씨 꿈은 경비하는 거였어요?"

 

느닷없이 송화가 그렇게 물어왔다.

'어라, 요놈봐라!'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저씨 꿈은 아파트경비원이었다. 근데 니꿈은 뭐꼬?"

"저는요. 판사도 하고싶고요 또 수학자도 되고싶어요!"

"그래에, 니는 꿈이 많아 참 좋겠구나."

송화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냐고.

엄마는 미국에 가셨고 아빠는 강원도에 계신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갔다.

각초소를 한바퀴 빙돌아 1초소에 원대복귀한 가을이었다. 저녁때였다. 어둠어둠해서였다. 102동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등뒤에서,

"아저씨,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예, 안녕하세요." 그렇게 맞인사를 건넸는데,

아까처럼 등뒤에서 들려왔다.

"송화요!"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송화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있었다.

"너 대학생 되었구나."

"예, 올봄에 입학했어요."

2여 년을 못보는 사이에 송화는, 미스코리아에 출연시켜도 될만큼 팔등신의 늘씬한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또 2년이 흘러갔다.

김천대학 간화과를 졸업한 승하는 스물다섯 예쁜 아가씨가 되었고, 수정이는 스무살 대학1학년이 되었다.

세월은 무심(無心)하다고 했던가!

아니다. 세월은 그저 무심한 듯할뿐이다. 할짓은 다하기 때문이다.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변화시키고 인간에겐 해마다 나이 한살씩을 보태주기 때문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를 아가씨로, 천하의 개구쟁이를 듬직한 청년으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해 여름날 소나기 쏟아지고 난 뒤, 동쪽하늘에 쌍무지개가 곱게 떴을 때, 무지개를 처음 발견한 여섯살짜리 단아가  "어, 저기 무지개 떴다!" 라고 외쳐댔다. 그 예뻐장한 꼬마아가씨 단아가 여덟살 초등학교1학년이 되었다.

2018.12.31. 마지막 근무를 하던 날밤, 중학교1학년이나 된 수빈이가 편지 한 장과 케익 한통을 사들고 아빠와 함께 경비실을 찾아왔다.

수빈이는 오늘이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근무를 하시는 날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컸지!'

수빈이를 바라보자니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지만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경비실을 들려가셨던 일곱 분의 이웃님 중엔 멋쟁이 아줌마 단아엄마도 끼어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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