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추석쇠러 내려왔다. 내 사랑 두 손녀딸도 엄마 아빠따라 내려왔다.
큰 손녀딸 신우가 부쩍 컸다. 지난 5월에 내려왔을 때보다 반 뼘정도는 더 큰 것 같다. 아이들은 여름 소낙비에 오이 커듯 그렇게 자라는 법이다. 그른데 빼빼했다. 밥을 잘 먹지 않고 편식을 해서 그럴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인 나를 닮아서 우리 신우가 빼빼할지도 모른다. 열한 살, 큰 손녀딸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다.
일곱 살짜리 막둥이 손녀딸, 꼬맹이는 통통했다. 언니에 비해 아주 건강했다. 발목을 쥐어보니 꼭 돌덩이 같았다. 고것은 밥을 아주 잘먹는다.
"나는 밥을 잘 먹어 통통하고 언니는 밥을 잘 안먹어 빼빼해요. 할아버지!" 일곱살짜리 꼬맹이 눈에도 살집이 없는 언니가 안쓰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추석날 오후 도산서원에 들렸을 때 쪼르르 달려가는 꼬맹이를 보고 집사람이 말했다.
"조것이 어제 마트에 따라가서도 떼를 안 써요. 올봄만 해도 떼를 썼었는데. 큰 아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교육을 시켜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하더라고 집사람이 얘기했다."
'그 노무 자식들, 저 어린 것들을 숙맥을 만들어!'
큰 아이와 며느리가 미워졌다.
그랬다. 큰 아이는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다가 뜬금없이 사직을 하고 김밥집을 창업했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달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하고 말았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그렇다. 사랑을 아무나 못하는 것처럼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장사를 해보지 않았다. 초년에 공무원을 그만 뒀을 때 장사를 해보려고 맘도 먹어보았지만 마음을 바꿨다. 장사에 대한 경험도 없을 뿐더러, '장사는 아무나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술만 한잔 드셨다하면 지게작대기를 들고 그 좋은 면직원 자리를 그만 뒀다면서, "이노무 자식, 패직이 뿔난다!" 라시며 도망가는 자식을 쫓아오곤 하셨다.
젊은 날의 한편의 자화상은 그렇게 엮어졌다.
군에서 제대를 하던 해인 1971년 10월, 문경지방공무원5급을(현9급) 공채시험에 합격한 나는 이듬해 5월, 마성면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덜렁 사표를 내버렸다. 그런 자식이 미워서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지게작대기를 꼬나잡고 쫓아오시곤 하셨다.
그래서 아내를 데리고 도망쳐 나온 곳이 42년째 살아가고 있는 이곳 영주다.
얻은 직장은 국역기업체 징수원이었다. 세리 아들은 낳지도 마라 했다. 그 힘들고 지긋지긋한 징수원 생활을 16년 8개월이나 했다.
1992년 8월, 영주시지방공무원 기능직으로 복직했다. 1972년도에 그만 두었던 공무원을1992년 8월에 다시 시작했다. 20년 만에 다시 공무원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렇게 재개한 공무원생활을 12년 4개월 근무하고 2004년 연말에 정년퇴직했다.
퇴직을 하였으나 연금수급권이 없었다. 군경력 3년과 고향인 문경에서 복무했던 공무원경력을 다 합산해도 20년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퇴직후 살아가려고 선택한 직업이 아파트경비원이었다. 먹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성격 고약한 내가 경비원 생활을 12년 5개월째 하고 있으니 말이다.
큰 아이는 창업투자비 3천 만 원만 날리고 그렇게 폐업하고 말았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시장조사도 안해보고 막연히, '잘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근 10여년을 일정한 직업없이 막노동도 하고 이런 저런 잡일도 하면서 큰 아이는 가계를 꾸려가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큰 아이의 인생행로는 첫 결혼에 실패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18여 년전, 첫번째 며느리와는 1998년 가을, 귀향길 열차안에서 만났다고 했다. 둘이는 대학동기라고 했다.
간호사였던 며느리는 다 좋은 데 오만한 성격이 문제였다. 시아비인 나는 어려워 하였으나 시어미인 집사람은 만만히 보는듯했다. 1999년 가을 추석을 쇠러온 며느리를 불러 앉히고 혼쭐을 내버렸다.
며느린 지 서방인 큰 아이하고도 잦은 마찰을 일어키는 것 같았다. 당시 큰 아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실직상태였었다.
아들내외는 그 이듬해 가을 완전히 남남으로 갈라섰다. 결혼 초 밀월시기에는 이 시아비의 사랑을 담뿍받았던 며느리는 그렇게 제 갈길로 날아가 버렸다.
2007년 큰 아이는 지금의 며느리와 재혼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아가씨였다. 너무도 볼품 없고 어정쩡한 아가씬지라 결혼 승락을 거절했다. 그러나 저희들이 좋다고하니 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며느리는 예쁜 두 손녀딸을 우리 내외에게 안겨줬다.
저네들이 사는 경기도 안양으로 올라간다며 어제 오후에 아들내외가 근무지로 찾아왔다. 지나간 설에 그랬던 것처럼 며느리 손에 돈 10만원을 쥐어졌다.
주면서 말했다. "너희가 가난에서 벗어나면 어미에게 명절날, 용돈 좀 받고 싶구나!" 라고.
순간, 나는 보았다. 며느리 두 눈에 비취는 하얀 눈물을.
"신우야, 밥 많이 먹고 튼튼해 져라!"
"예. 할아버지."
손녀딸은 언제나 대답은 잘 했다.
두 손녀딸은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갔다. 저네들이 살고 있는 안양을 향하여 팔랑팔랑 날아갔다.
비쩍 말라버린 내 가슴을 촉촉히 젹시고 올해 추석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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