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물따라

푸른제복시절의 추억/문경아제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7. 7. 28. 11:55

장생포는 울산시 남구에 속하는 울산만 서쪽에 위치한 포구다. 고래잡이 전진기지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20대 젊은 시절 난 삼년간의 군생활을 거의 울산에서 했다. 육군 경비정 울산호를 탔을 때,

그때 장생포항은 우리배의 정박항이었다. 우리배는 앞뒤로 케라바50이 설치된 20톤철선이었다.

50여 년, 반세기를 넘겨버린 까마득한 옛날 얘기라 얘기하기가 홀가분하다.

장생포에서 거룻배를 타고 장생만을 건너가면 용잠마을이 있었다. 거룻배 사공은 처녀였다. 노래에 나오는 처녀뱃사공이었다.

용잠마을은 20여호쯤되는 어촌마을이었다.

봄이면 용잠 앞바닷가 모래밭엔 어민들이 미역을 말리곤 했다. 하얀 백사장에 마을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앉아,

미역을 말리는 모습은 가히 구경할만했다.

하얀 모래밭 이곳저곳에 펼쳐놓은 발위에는 푸릇푸릇한 미역이 말려지고 있었다.

짭쪼름한 미역내음은 코끝을 자극하는 싫지 않는 냄새였다. 마을의 여인네들은 라디오 켜놓고,

온갖 수다떨어가며 따온 미역을 손질해 발에 널곤 했다. 무리 중엔 예쁜 아가씨도 있었다.

아가씨 낚는 재주라도 있었드라면 우리집 안사람은 아마도 울산큰애기였을 것이다.

아가씨 하나를 낚아채간 솜씨좋은 전우도 있었으니까말이다.

푸릇푸릇한 미역과 하얀 모래밭, 한 무리의 여인들!

그 위에 끼욱끼욱 갈매기라도 날아다니면 그것은 잘 그려진 봄날의 수채화였다.

짭쪼름한 미역냄새와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파릇파릇한 어촌마을 큰애기의 파란 꿈이 하늘가에 둥둥 떠다니는 한폭의 잘그려진 봄날의 수채화였다.

장생포초등학교는 장생포항 뒤 도로변에 있었다.

고래를 실제로 보지못한 사람들은 고래가 얼만큼 큰지 감이 잘 잡히지 않을 것이다.

당시 장생포초등학교 교문위에 얹혀진 아취는 고래 갈비뼈였다. 밭가에 듬성듬성 박아놓은 말뚝도 고래뼈였다. 고래는 그만큼 컸다.

고래를 잡아서 입항하는 포경선은 정해진 신호에 따리 고동을 울려야했다. 일테면 뱃고동을, "붕 붕 부웅!" 하고 세번 울린다든지 하는 신호말이다.

고래고기는 새큼하다. 고래고기를 삶을 때면 좁다란 장생포항엔 새큼한 내음이 한가득이었다.

 

제대한지 46년이 지났다. 1969년도 얘기이니 반세기가 다돼가는 48년 전의 얘기다.

강산이 휘돌아 다섯번쯤 바뀌었다. 대한민국육군일등병이었던 필자도 일흔에 귀 하나가 붙어버린 노인네가 되었다.

기억력의 한계로 묘사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현명하신 독자님들께서 댓글로 지적하시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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