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1965년>
사랑은 神에게의 질문, 탄식, 갈망
사랑을 이해해 보려던 때가 있었다. 가을 저녁을, 새벽을 이해해 보려던 것처럼 무모한 시도였다.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차마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세계 앞에서 두렵고 외롭고 떨렸으므로 '이해'까지가 절대로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저편에서만 빛났다.
어느 순간 신앙 체험에서 말하는 '들림'과도 같은 사랑이 올때, 그 사랑은 신성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탐구는 곧 신을 향한 질문이요 탄식이요, 비통한 갈망이다. 사랑이란 진주를 품은 자는 다만 아프고 뿌듯할 뿐이다.
'기쁨과'과 '갈망' 이 동시에 자라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그것은 근심과 같으 것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근심은 외롭고 고단한 것임으로 누군가의 손을 부른다. 손 잡는 다는 것, 그 맞잡은 손에서 열리는 빛이 곧 사랑의 뜻임을 알게한다. 손 잡아준다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처럼 쉬운 일이 없으련만 우리는 그마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처음에 이 시를 눈으로 읽기 전에 귀로 '들었던' 분들이 많을 것이다.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의 음성이었고, 작년 봄에 세상을 뜬 작곡가 김순애 선생이 빚은 선율이었다. 송창식의 청신한 목소리와 몸짓 또한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핵심들을 샘물처럼 쏟아부었다. 발길이 바람부는 새파란 풀밭을 만나거나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멜로디를 흥얼댔다.
김남조(81)는 영성(靈性) 가득한 시인으로서 우리 여성 문단의 독보적(獨步的) 존재였다. 지금도 기도와 사랑과 겨울의 시인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신의 보태심 없는 그리움의/罰이여/이 타는 갈망/(...)/다 같이 늙어진 어느 훗날에/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어여쁘디 어여쁜/후조라고 할까/(...)' (<候鳥>) 김 시인은 "아무리 시에 재기가 많아도, 시대에 대한 모럴이 가득해도 영성이 없어서는 미달이지 않는가" 라 말한 적이 있다. 진정 시의 원로만이 할 수 있는, 갈증 나는 이 시대의 영혼들에게는 샘물과도 같은 말이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