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물따라

꽃동산.3

하늘과 바람과 별시 2015. 10. 19. 11:26

 

꽃동산에 가을이 깊어간다. 사시사철 푸르런 소나무만 그대로일뿐 울긋불긋 화사했던 꽃들은 다져버리고 없다. 나즈막한 떨기나무의 잎새는 칙칙한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꽃동산에 다다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늘 있는 그 자리에 한 뼘의 움직임도 없이 엉덩이 깔고 앉아만 있는 꽃동산을 바라보며 비 맞은 중같이 중얼거렸다.

'어이 여보게, 자네 출세했네 그려. 40여 년 전,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땐 참으로 촌놈이었는데 이젠 신수가 훤해졌으니 말이네.' 꽃동산의 대꾸가 득달같이 날아온다.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출세를 했다니!'

'에끼, 여보게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첨 만났을 땐 자넨 돌로 얼기설기 쌓아올린 담장안에 백일홍, 봉숭아, 채송화같은 꽃 몇 포기 심어놓고 꽃동산입네 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담한 소나무 구해오고, 듬직한 바위 앉혀놓고, 철따라 고운 꽃이 피고, 밤이면 현란한 등이 떠니 출세한 것이 아니냐 말일세.'

꽃동산이 빙그레 웃으며 또 다시 대꾸를 해온다.

'그런가. 자네 글 쓰지. 그런데 자네가 쓴 글은 늘 하얀 빛깔이지. 화려한 색깔의 글은 자넨 못 쓰지. 나도 그렇다네. 자네처럼 화려한 것은 별로라네. 지금처럼 화사한 외형보다는 그 옛날,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 들리고 소박한 꽃 몇 포기 심겨져 있는 원래의 내 모습을 사랑한다네. 그런데 자네 술 한 잔 했네 그려. 자네 술 먹으면 안 되지. 많이 마시지 말게.'

'그래, 친구 고마우이. 시내나갔다가 막걸리가 하도 먹고 싶어 불바위 사는 친구 만나 딱 한 잔 했다네. 여보시게, 친구! 우린 40년 지기 아닌가. 그러니 부탁하네만 자네 품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같은 인간들 잘 좀 다독거려 주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러다가 다시 사랑하는 소탈한 인간들의 군상을 잘 좀 지켜봐주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쯤에서 택시가 쏜살같이 달려온다.죽기 싫으면 비키라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온다. 정신이 확 든다. 도란거리던 꽃동산의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 환청이었나 보다.

나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헤아리는 버릇도 생겼다. 그 옛날, 고향집 초가지붕위에 피어난 하얀 박꽃이 그리워 지기도 했다. 그래. 오늘밤 우리 집 지붕위엔 밤새도록 헤어도, 헤어도 못다 헬, 하고 많은 별이 뜨렷다.

"스토리텔링, '꽃동산' 중에서"

'길따라 물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짝꿍  (0) 2015.10.26
황톳불이 따끈했다/문경아제  (0) 2015.10.24
서천의 팔각정  (0) 2015.10.18
구성공원  (0) 2015.10.17
외줄타는 사람들/문경아제  (0) 2015.10.17